인스턴트 냉면이 라면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간이 식품이 될 수 있을까? 냉장면 시장은 업체들의 노력에 힘입어 해마다 성장하고 있다.
[매거진 esc] 전문가의 5개 인스턴트 냉면 품평…면은 합격, 육수는 불합격
인스턴트 평양냉면이 라면처럼 대중화될 수 있을까? 한때 매콤하고 단 함흥냉면이 반짝 인기를 누렸다. 많은 함흥냉면 프랜차이즈가 명멸했다. 최근엔 평양냉면이 식품업체의 주목을 받는다. 업체마다 경쟁적으로 평양냉면 제품을 출시했다. 풀무원은 물냉면만 7종 내놨다. 시장도 커진다. 지난해 냉장면 시장은 1600억원 규모이고 이 중 냉면은 450억원 규모다. 올해 냉면 시장은 더 커질 것으로 업체들은 전망한다.
인스턴트 냉면이 단 이유는
평양냉면은 남한에서 쉽게 먹기 어려운 음식이었다. 전통 있는 평양냉면 식당은 손에 꼽을 수 있고 그나마 서울에 몰려 있다. 그러므로 인스턴트 평양냉면은 소비자에게 축복이다. 그러나 출시된 평양냉면 제품의 맛은 전통 평양냉면의 맛과 비슷할까? 특유의 담백한 평양냉면 육수 맛을 인스턴트 제품에서 느낄 수 있을까? 수십년 동안 평양냉면과 씨름해 온 벽제갈비의 김영환(62) 회장이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대표적인 인스턴트 냉면을 품평했다. 벽제갈비는 평양냉면 식당인 봉피양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1950년대부터 서울의 여러 냉면집에서 주방장으로 일했던 김태원(71) 벽제갈비 조리부 실장이 봉피양 평양냉면 맛을 책임진다. 김영환 회장도 오랫동안 냉면 맛을 연구해 왔다. 이달 10일 김 회장이 풀무원 생가득 평양물냉면, 씨제이 동치미 물냉면, 농심 둥지냉면, 청정원 우리밀 한우육수 물냉면, 오뚜기 김장동치미 평양물냉면 등 다섯 가지를 품평했다. 정확한 비교를 위해 주방에서 다섯 제품을 동시에 조리했다. 김영환 회장이 이들 인스턴트 냉면에 대해 내린 총평을 정리했다.
면은 먹을 만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다섯 업체 모두 육수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면에 대한 평가도 먹을 만하다는 것이지, 전통 평양냉면의 툭툭 끊어지는 식감과 거리가 멀었다. 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에 묘사된 평양냉면이나 서울시내의 전통 평양냉면집 냉면은 이렇게 달지 않다.
이들 업체들이 추구하는 인스턴트 냉면 육수의 맛과 스타일은 어떤 것일까? 업체들은 공통적으로 서울시내의 오래되고 유명한 평양냉면 집을 두루 연구했지만, 육수 맛을 그대로 살리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씨제이는 원조 평양식 냉면은 소비자들이 느끼하게 여기는 탓에 느끼함을 줄이고 소비자들이 좋아할 수 있는 맛의 조합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풀무원도 전통의 평양냉면은 무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담백하므로 현대인의 입에 더 잘 맞는 맛을 찾았다고 밝혔다. 농심은 “고종 황제가 즐기던 동치미에 배를 썰어 넣은 맛을 접목했다”고 설명했다. 담백함보다 달고 시원한 맛이 지금 한국인의 입맛에 더 맞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동치미, 식초, 육수 등 식재료 외에 달고 시원한 맛과 향을 인공적으로 더해주는 향미증진제가 풀무원을 제외한 네 제품에 모두 들어갔다.
김영환 회장은 “평양냉면을 제대로 즐기려면 수고가 필요하다. 처음엔 맹맹하지만 자꾸 먹으면 그 맛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식품업체들이 평양냉면을 달게 만드는 이유에 대해 “평양냉면의 맛을 알려면 약간 시간이 걸리는데 단맛으로 초장에 승부 보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봉피양, 필동면옥, 평양면옥 등 역사 깊은 평양냉면 집에서는 보통 고객들이 냉면과 함께 편육이나 만두, 전을 곁들인다. 전통 평양냉면이 언뜻 맹맹한 것 같지만, ‘냉면+만두’나 ‘냉면+불고기’ 등 다른 음식과 조화를 생각하면 적절하다고 김 회장은 덧붙였다. 그는 인스턴트 냉면이 단맛을 내는 또다른 이유로 다른 음식과의 조합을 고려하지 않는 것을 들었다.
인스턴트 물냉면에 대해 아쉬움을 나타낸 이는 김 회장만이 아니다. 지난해 수원대 식품영양학과 김희섭 교수가 발표한 <냉면의 조리과학적 연구현황>을 보면, 외국인 참가자들이 4종의 인스턴트 물냉면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참가자들은 면에 대해 ‘지나치게 탄성이 있다’(Extremely elastic), ‘거의 씹을 수가 없다’(Hardly chewable), ‘질기고 길다’(Chewy-stretch long noodle) 등으로 표현했다. ‘역겹고 소바나 일본 소면(소멘)이 낫다’(Disgusting, prefer Soba or Somen)는 평도 있었다. 인스턴트 냉면 육수에 대해서는 ‘쇠고기 육수 같지 않다’(Un-beefy beef broth), ‘차갑고 약간 시다’(Chilled, slightly acidic), ‘신선하다’(Refreshing) 등으로 평했다.
면에서도 ‘타협’이 이뤄졌다. 평양냉면 면에는 메밀이 들어간다. 툭툭 끊어진다. 그러나 인스턴트 냉면 면에서 이런 식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들 다섯 제품의 포장지에서 글루텐·구아검 같은 증점제(빵·면류 등의 쫄깃한 점성을 높여주는 첨가물)나 점성을 높여주는 전분 성분이 들어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면을 포장해 오래 유통하기 위한 기술적 선택으로 해석된다.
외국인들도 아쉽다는 평가
평양냉면은 겨울밤이 긴 이북에서 서민들이 가가호호 만들어 먹던 음식이므로 ‘정통’을 따지는 건 어불성설이다. 집마다 메밀 함량이나 쇠고기 육수에 넣는 동치미 국물과 꿩고기(또는 닭) 육수 양이 다를 수밖에 없다. 평양냉면 집 을밀대의 윤민정(43) 부장이 평양냉면에 삶은 달걀을 올리는 것이 정통인지 아닌지 미식가들이 갑론을박한 것에 대해 “가풍의 차이일 뿐”이라고 답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러므로 이들 인스턴트 냉면에 대해서 “정통이 아니다”라고 마냥 비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맛이나 스타일이 획일적인 것은 아쉽다. 김영환 회장이 지적한 것도 다섯 제품이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이었다. 김희섭 교수도 논문에서 냉면의 다양화를 주문했다. “평양냉면의 인스턴트화가 불가능한 건 아니다. 식품업체에서 좀더 분발했으면 한다”는 김영환 회장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풀무원 냉면이 지난해 미국에서만 약 300만달러어치 팔리는 등 인스턴트 냉면 수출도 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현지 한국인들이 주요 소비자다. 맛이 나아지고 다양해진다면, 냉면이 한국을 알리는 외교대사의 구실도 할 수 있다. 농심이 음식문화 포럼을 열고 음식전문 도서관을 지어 냉면 세계화의 깃발을 드는 등 업체의 노력도 시작됐다. 맛은 국경을 넘는다.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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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피양의 김영환 회장은 맛과 스타일의 다양화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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