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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집 아물고 걸음 내디뎠을 때 행복했죠”

등록 2008-12-17 18:53수정 2008-12-20 15:47

[매거진 esc]
김남희(38)와 유성용(37)은 2008년 여행 스타다. 여행 스타라는 말을 둘은 공히 싫어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여행 스타다. 남들과 달리 묵묵히 여행한 그들은, 세상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었다. 여행조차 패션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자신들만의 발자국을 찍어온 그들이다.

김남희가 스스로를 세상에 던져 사람들과 만나며 또박또박 발자국을 찍는 여행자라면, 유성용은 여행 속에서 사색하고 구도하며 본질을 묻는 여행자에 가깝다. 재미있게도 둘은 2005년 인도 배낭여행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만만치 않은 여행 팬을 거느리고 있는 둘을 만났다.


걷기 여행 바람 일으킨 도보여행가 김남희씨
걷기 여행 바람 일으킨 도보여행가 김남희씨

“물집 아물고 걸음 내디뎠을 때 행복했죠”

걷기 여행 바람 일으킨 도보여행가 김남희씨 인터뷰

김남희(38)는 한비야처럼 도전정신으로 가득 찬 여행자가 아니다. 여행을 가서도 사람 만나는 게 두렵고 번번이 물집이 잡히는 발바닥은 이른 귀향을 재촉하는,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다.


그녀를 만난 건 그녀가 일본 시코쿠 불교성지 순례길을 걷고 돌아온 이튿날 아침이었다. 1200㎞를 인생 총 주행거리에 추가한 날. “제 얼굴이 밝아지지 않았나요? 예전보다 짜증이 줄었고 감사하는 법도 알게 됐고 ….”

일본 시코쿠에서 1200㎞ 걷고 오다

김남희는 1993년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했다. ‘외국여행’에 양심이 찔리던 운동권 언저리에서 활동하면서도 여행에 대한 꿈을 키우며 꼬박꼬박 돈을 모았고, 이윽고 졸업하자 마자 배낭을 메고 유럽으로 떠났다. “60여일 동안 식빵에 잼을 발라 아침밥으로 때우고, 아낀 돈으로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아다니던 열정에 스스로 놀란 뒤” 그녀는 여행의 시간에서 자신이 가장 열정적이고 성실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남희는 여행 중에도 자신의 이야기를 홈페이지에 꼬박꼬박 올린다. 이제 막 다녀온 시코쿠 불교성지 순례 길에서 찍은 풍경. 김남희
김남희는 여행 중에도 자신의 이야기를 홈페이지에 꼬박꼬박 올린다. 이제 막 다녀온 시코쿠 불교성지 순례 길에서 찍은 풍경. 김남희

다행히 그녀의 첫 직장 터키대사관은 일년에 한 달씩 휴가를 줬고, 그녀는 일년의 12분의 1을 길에서 보냈다. 삶이 정해진 도로로 향하는 것 같아서 이혼을 한 뒤에는 여섯 달 동안 회사와 집만 오갔다. 그녀는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웠기’ 때문에 정작 자유를 얻은 뒤에는 두려웠다. 그때 <오마이뉴스>에 다니는 후배가 권유했다. 누나는 여행을 좋아하니까 여행기를 한번 써보라고.

“글 쓰는 건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었어요. 내 자신을 위로하는 행위죠.”

여행하다가 글을 쓰고 싶어서 글을 쓴 그녀는 2004년 한반도를 걸어서 섭렵한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을 냈다. 그리고 이듬해 프랑스 생장피드포르에서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순례자의 길 ‘카미노 데 산티아고’ 800㎞를 걸었다.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2>로 출판된 그녀의 책은 산티아고 바람을 일으켰다. 20~30대 직장여성들의 로망은 사표를 던지고 산티아고로 떠나는 거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 뒤에도 김남희는 쉼없이 걸었다. 네팔, 중국, 라오스, 미얀마 등을 걸었고 그녀는 도보여행가로 성장했다.

걸으면 관계 맺는 방식이 달라진다. 접촉사고로 만난 자동차 운전자들은 삿대질을 하지만 자전거 운전자들은 서로 “괜찮냐”고 묻듯이, 시속 3㎞로 걷는 여행자는 낙오자를 기다리고 힘든 이에게 밥을 먹인다. 속도는 줄어들지만 시간은 늘어난다. 자동차는 풍경을 긋고 지나가지만 걷는 사람은 풍경 안에서 움직인다. 풍경 안에서 “자신과 타인 그리고 자연을 천천히 둘러볼 수 있”게 된다. 그녀는 “언제든 멈출 수 있는 게 걷기 여행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걸어서 그녀는 컸다. 놀이로서 여행을 시작했지만 직업으로서 여행을 요구받게 됐다. 하지만 그녀는 입버릇처럼 “나는 여행작가로서 훌륭하지 않다. 기본적으로 나는 놀러 다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지금도 장기 여행을 다녀온 뒤, 집필 작업에 매달릴 때는 진도가 빨리 나가지 않는다. 이어지는 프로답지 않은 후회. ‘내가 왜 그때 이름을 안 물어봤지?’ ‘게스트하우스의 숙박료는 얼마였지?’ 하고 잠시 멈칫.

“올해의 나는 ‘직업과 놀이 사이에서 약간 방황 중’이라고 할까요?(웃음) 지금도 여행이 즐겁고 나를 위해 글을 쓰는 것엔 변함은 없어요. 여행이 취미를 방해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는 걸 보면 아직은 놀이로서의 욕망이 강한 것 같아요.”

어쩌면 김남희의 장점은 이것이다. 여행과 인간이 관계 맺는 방식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 사람이 여행을 통해 힘을 얻고 성장하는 것. 올해 가장 재밌었던 일을 묻자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지난 10월 말 시코쿠를 걷는데, 열흘이면 아물 물집이 한 달 가까이 가는 거예요. 몸의 균형이 무너지고 정신의 균형까지 무너지더군요. 며칠을 포기와 전진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이윽고 물집이 아물고 가뿐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 그때 너무 행복했어요.”

직업과 놀이 사이에서 약간 방황 중

평범한 우리가 여행으로 성장할 때, 우리 또한 그녀 같을 것이다. 그녀가 겪은 성장통을 겪고 그녀가 받은 여행의 선물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여행의 힘이다.

“그런 일들이 가능한 건 이 길이 산티아고로 향하기 때문이야. 이 길에서는 사람들이 달라지니까. 이 길을 걷는 동안 사람들은 마음을 열게 되거든. 두 번의 산티아고 순례가 내게 남긴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이 길에서 내가 만났던 사람들이야. 이 길에 서게 된 걸 축하해.”(<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2> 중에서)

김남희의 여행의 친구들. 나침반이 붙은 목걸이와 라이카 카메라 그리고 맥가이버 칼.
김남희의 여행의 친구들. 나침반이 붙은 목걸이와 라이카 카메라 그리고 맥가이버 칼.

김남희는 도보여행가다. 대한민국, 카미노 데 산티아고, 중국, 라오스, 미얀마, 네팔 등을 걸었다.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시리즈에 여행을 기록했다. 지난해부터 스페인에서 머무르던 그녀는 올해 초 유럽을 걸었고 이어 2~3월 모로코를 여행했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 5월에는 네팔 그리고 10~12월에는 일본 시코쿠의 불교성지 순례길을 걸었다. 내년에는 멕시코에서 출발해 남아메리카 대륙을 걸어서 종단하려고 한다. 누리집 skywaywalker.com


〈esc〉에 ‘스쿠터 다방 기행’ 연재한 유성용씨
〈esc〉에 ‘스쿠터 다방 기행’ 연재한 유성용씨

여행생활자, 생활여행자로 변신하다

〈esc〉에 ‘스쿠터 다방 기행’ 연재한 유성용씨 인터뷰

서울 성북2동 226번지. 유성용(37)의 집에 가면 여행 간 것 같다. 일상의 장소인 것 같기도 하고 여행의 장소인 것 같기도 하다. 산동네의 키 작은 박공지붕 집마당에선 서울이 내려다보인다. 오른쪽은 서울성곽이, 왼쪽은 고층아파트 단지가 하늘을 두른다. 그 밑으로는 레고블록처럼 펼쳐진 다세대주택들이다. “6년 전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5만원”으로 들어온 집.

여행은 일상과의 관계에서 정의된다. 특히 20세기 산업시대에 이르러 여행은 권태로운 노동과 노동 중심으로 짜인 일상의 탈출구이자 로망이 되었다. 이어 여행은 원활한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체제의 요구로 산업화됐고, 대중들은 노동에 지친 일상에서 여행을 꿈꾸고 실현한 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왕복운동을 지속했다. 유성용은 여행과 생활의 관계를 탐구하는 여행자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여행문학 계보에 올려두고 싶어지는 <여행생활자>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여행이 굴리고 다녀서, 나는 여행생활자가 되었다.”

지나친 여행에 대한 꿈은 부조리한 일상의 반영이다. 유성용은 “나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풍경과 사건과 사연들에 충실해지다 보면 혹여라도 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유성용
지나친 여행에 대한 꿈은 부조리한 일상의 반영이다. 유성용은 “나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풍경과 사건과 사연들에 충실해지다 보면 혹여라도 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유성용

초대하지 않은 그곳 다방으로 떠나

유성용에게 여행과 생활은 대구를 이룬다. 안과 밖이자, 밖과 안이고, 일상이 꾸는 꿈이자, 꿈이 꾸는 일상이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여행을 꿈꾸고 여행에서는 일상을 꿈꾼다. 얼마나 미련한 짓인가? 이 뫼비우스의 띠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을 줄이고 바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터전을 여행에 가져가선 안 된다. 여행상품을 구매하는 구경꾼 소비자가 될 뿐이다. 이렇게 할 때 여행이 일상이고 일상이 여행이 된다. 그제야 여행은 거대하게 부푼 구름처럼 불어 여행자를 굴린다. “세상에서 뺨 맞고 대책 없이 떠난” 히말라야 자락에서 그는 여행을 깨달았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여행기’라는 표제가 붙은 <여행생활자>는 그때 경험을 토대로 지난해 나온 책이다.

유성용은 올해 <여행생활자>의 대구 격인 <생활여행자>를 냈다. <여행생활자>가 세상에 나온 뒤 그의 홈페이지 맹물닷컴(maengmul.com)을 중심으로 집산하기 시작한 팬들은 오프라인 모임에 60명이 모일 정도로 많아졌다. 그리고 올해 또한 여행이 그를 굴렸으니, 〈esc〉에 연재된 ‘스쿠터 다방 기행’이다.

“초대받은 곳은 다 늪이었어요. 전국의 지자체는 너도나도 앞다투어 관광지를 개발해 우리를 초대하지만, 그렇게 해서 간 곳은 예전의 그곳 같지 않았죠. 반면 다방은 초대하지 않아요. 인정투쟁, 성과주의, 행복에 대한 강박에서 비켜난 자연스러운 곳이죠.”

그가 스쿠터를 타고 다방 레지를 만나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지자, 지인들은 전통과 관록의 지역 다방을 추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행의 다큐멘터리적 기록을 저어하는 그는 그의 스타일처럼 ‘발길 닿는 대로’ 갔다. 먼저 시청 앞에 갔다. 하지만 시청은 십중팔구 신도시로 이전했으니 그곳엔 다방이 없었다. 이력이 붙은 그는 이제 처음부터 “구 시청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어김없이 그곳엔 다방이 있다.

다방을 생활처럼 다니던 틈틈이 유성용은 멕시코와 이란, 인도와 부탄을 여행처럼 다녔다. 교육방송의 <세계테마기행> 촬영차 갔다 온 곳들이다. 피디 한 명, 출연자 한 명으로 구성된 초미니 제작진이 함께한 일상은 ‘촬영’이라기보다 ‘여행’에 가까웠다. 무거운 방송장비를 피디에게 다 맡길 순 없었으므로, 지난달 인도 시킴의 설산을 오를 때도 유성용은 트라이포드를 져야 했다.

“평소답지 않게 고산증이 엄습했어요. 왜 여기에 왔는지 왜 꿈을 꿨는지 상념은 없어지고 내 속의 것은 자취를 감췄지요. 주도성을 잃고 여행에 말려든 거죠.”

거대한 바깥을 보라. 유성용이 스리랑카에서 스친 풍경. 유성용
거대한 바깥을 보라. 유성용이 스리랑카에서 스친 풍경. 유성용

고산증에 고생하며 여행에 말려든 자신을 발견

여행은 그를 넘어섰고, 그는 여행에 군림당했다. 올해 여행이 그를 가장 세게 굴린 순간이었다. 그에게 물었다. 당신의 친한 동생이 석 달 동안 인도에 머물기로 한다면 어떤 실용적인 충고를 해주겠느냐고. 그는 대답했다. “먼저 그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할 거예요.”

유성용은 오는 3월 지리산으로 내려갈 예정이다. 그러니까 지리산에서 여행 혹은 생활이 시작된다. 지인들과 함께 ‘바깥’이라는 이름의 출판사를 차려 해마다 한 권씩 책을 낸다고 한다.

유성용의 여행의 친구들. 탕탕한 등산화와 배낭.
유성용의 여행의 친구들. 탕탕한 등산화와 배낭.

유성용의 첫 책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사랑>이라는 에세이다. 여행책은 중국과 티베트, 인도와 파키스탄 등 히말라야 자락을 일년 반 동안 여행하고 지난해 펴낸 <여행생활자>가 처음이다.

유성용은 올해 멕시코와 이란, 인도 시킴주와 부탄을 여행했고, 긴 여행 사이 틈틈이 스쿠터를 타고 전국의 다방을 돌아다녔다. 성북동 산동네에서 여행하듯이 생활해 <생활여행자>를 썼다. 누리집 maengmul.com

글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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