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의 요리. 세이지향의 부드러운 돼지고기, 구운 거위간, 달팽이와 엘비스타일의 가지.
[매거진 esc]
김치 마멀레이드 선보인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 등 고급 레스토랑 잇따라 한국 상륙
‘한국적인 것’의 많은 부분이 허상이듯 ‘민중적인 것’도 상류층에서 온 것이 많다. 한국인이 고추를 먹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다. 400여년밖에 안 된다. 서민의 음식문화도 마찬가지다. 설렁탕의 기원이 조선시대 왕실에서 행한 기우제에 있음은 이미 널리 알려졌다. 너비아니도 왕실 음식이었지만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서민들도 즐기는 음식이 됐다. 육개장은 양반들이 개장국 대신 즐기던 음식이었다.
이처럼 ‘문화는 위아래로도 흐른다’는 사실을 아는 미식가라면 최근 잇따라 문을 연 특급 레스토랑이 한국 외식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궁금할 것 같다. 롯데호텔 서울이 지난 10월1일 피에르 가녜르의 이름을 딴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을 열었다. 이는 미식가와 외식업 종사자 사이에서 큰 뉴스였다.
쌀과 샴페인의 조합 등 실험정신 돋보여
피에르 가녜르는 프랑스의 유명 레스토랑 안내서 <미슐랭 가이드>에서 1998년 이후 여러 차례 최고 평점인 별 셋을 받은 요리사다. 2008년 현재 전세계에서 68개의 레스토랑만이 이 매체에서 별 셋을 받았다. <미슐랭 가이드>에 대해서 “평가가 주관적”이라는 비판도 있고 “조리법에만 집착해 표피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별 셋 평점은 적어도 요리의 수준에 관해 여전히 권위를 지닌다. 롯데호텔 서울은 한국의 외식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리고 동시에 롯데호텔의 품격도 높아진다는 점을 영입 이유로 설명했다.
가녜르 음식의 핵심은 색과 선의 조화를 강조하는 색감, 질감, 예술적인 영감이다. 10가지 이상의 음식으로 구성된 다채로운 코스 요리가 그 결과물이다. 극단적인 온도나 조리법을 사용하는 분자요리의 대가로도 유명하다. 10월 초 그의 요리를 처음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도 흰색 접시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듯 식재료의 색감을 살린 구성이었다. 쌀과 샴페인을 가미한 비스크(크림수프의 한 가지)에서는 실험정신이 돋보였다.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의 제롬 루아(31) 수석조리장은 쌀밥과 샴페인을 함께 사용한 이유에 대해 “밥알의 부드러운 질감에 샴페인의 신맛과 톡톡 튀는 맛, 즉 입안을 간질이는 질감이 입속에서 어우러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질감의 놀이’인 셈이다.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은 한 달 동안의 활동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점수를 줄까? 제롬 루아 조리장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피에르 가녜르는 1년에 두 차례만 방문하기 때문에, 현장에서 가녜르를 대신하는 것은 제롬 루아 조리장이다. 그는 프랑스 중동부 루아르 지역 투르 출신으로 15살 때 요리학교에 입학해 요리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7년부터 가녜르와 함께 요리를 시작했다.
피에르 가녜르가 1년에 두 차례만 한국을 방문하는데, 맛을 유지할 수 있는지 물었다. 기자가 “요리는 입맛이 중요하다. 식재료 하나를 택할지 결정할 때도 식재료를 맛봐야 하지 않나? 한계가 있지 않으냐?”고 물었다. 제롬 루아의 답이 이어졌다. “그런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맛을 보여줄 순 없지만 나와 가녜르가 가진 경험, 맛에 대한 공통의 기억이 있다. 내가 “이런 맛”이라고 설명하면 가녜르도 이해하고 역으로 내가 가녜르의 스타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 물론 그래서 내가 맡고 있는 일이 중요하다.” 메뉴 가운데 가장 화제가 됐던 김치 마멀레이드에 대해 제롬 루아 조리장은 “김치 마멀레이드는 내가 낸 아이디어다. 김치의 매운맛보다 식감이나 신맛이 인상적”이라고 설명했다. 기자가 “(내년 혹은 내후년에)<미슐랭 가이드>에서 별 두 개 이상을 받을 자신이 있냐”고 묻자 웃으며 “손님들에게 만족을 주는 게 중요하다. 만약 손님들에게 최대의 만족을 준다면 <미슐랭 가이드>에도 만족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참고로 피에르 가니에르 도쿄는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 두 개를 받았다.)
하루 80~100명씩 지난 한 달간 모두 1900명이 넘는 손님이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을 찾았다. 테이블 점유율이 80%를 넘는 셈.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은 주부와 일반인을 위한 눈높이 요리 강좌도 기획 중이다. 내년쯤 문을 열 이 강좌는 ‘한국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쉽게 다가갈까’ 하는 고민에서 나왔다.
피에르 가니에르 파리점은 영국의 레스토랑 안내서 <레스토랑 매거진>이 뽑은 ‘2008 최고의 레스토랑 50’ 가운데, 에스파냐의 분자요리 레스토랑 엘 불리, 영국의 팻 덕에 이어 3위에 뽑혔다. 또 2005년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일요판 <업저버>에서 ‘미식가가 꼭 가야 할 레스토랑 50선’에도 뽑혔다.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은 한국의 미식가들에게 이에 버금가는 점수를 받을 수 있을까? 점심 코스는 12만원과 20만원 두 종류가 있다. 저녁 코스는 22만원과 30만원 두 종류다. 270여종의 와인 리스트는 대부분 프랑스 부르고뉴 와인이며 15만원대부터다. 하우스 와인은 3만5000원부터 6종류.
프랑스의 제과·제빵·요리 학교 르 꼬르동 블루에서 서울시티클럽과 함께 운영하는 르 꼬르동 블루 시그니쳐스 레스토랑도 미식가들 사이에서 화제다. 꼬르동 블루 인터내셔널 소속의 자크 드페르 주방장이 직접 요리하고 메뉴를 컨설팅한다. 시그니쳐스는 2002년 캐나다 오타와 지점이 문을 연 뒤 세계에서 두 번째다. 자크 드페르 주방장은 프랑스 국가 공인 자격인 ‘프랑스 최고의 장인’으로 뽑힌 바 있다.
이달 초 맛본 프랑스 디에프 스타일의 홍합크림수프, 새송이버섯을 곁들인 으깬 감자와 한우 안심은 정갈한 맛이 돋보였다. 정통에 가까운 맛과 식감은 꼬르동 블루의 명성에 흠을 줄 것 같지 않다. 다만 하우스 와인을 주문하자 직원이 “프렌치 와인”이라고만 설명한 대목은 아쉬웠다. 어느 지역 와인인지를 재차 물었으나 품종이나 특징에 대한 설명 없이 “보르도 와인”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하우스 와인 가격이 잔당 2만4000원임을 고려할 때 와인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점은 옥에 티로 느껴졌다. 시그니쳐스 오타와점은 2003년 <웨어 투 잇> 캐나다판에서 캐나다 최고의 레스토랑 22곳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점심 코스는 6만8000원이고, 저녁 코스의 경우 8만원, 9만6000원, 12만5000원 세 종류다. 와인 리스트는 총 25개로 부르고뉴·보르도 외에 론, 루아르, 랑그도크 등의 와인도 갖췄다.
한편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프랑스 레스토랑 ‘테이블 34’에서도 지난 10월13일부터 18일까지 ‘프랑스 최고의 장인’ 출신 제라 빈야 주방장을 초청해 행사를 열었다. 빈야 주방장의 레스토랑도 2002년 <미슐랭 가이드> 별 하나를 받은 바 있다.
비싼 가격만큼 친절한 설명도 서비스해주길
일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에 육박하고, 미식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미슐랭 가이드>라는 이름도 한국에 널리 알려졌다. 피에르 가녜르는 한 일본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나는 비즈니스맨이 아니라 예술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슐랭 가이드>를 앞세우는 것이 마케팅용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도 있다. 이런 비판을 넘어 이들 최고 요리사들이 한국 식문화에 신선한 자극을 줄 수 있을까? 슬로푸드 대회에서 일반인들을 상대로 격의 없이 ‘디자인 인 푸드’ 강의를 펼친 ‘엘 불리’의 페란 아드리아 요리사처럼 말이다.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왼쪽부터 제롬 루아 수석조리장, 자크 드페르 주방장
시그니쳐스의 요리. 새우와 누아제트 감자소테, 갑각류 크림소스의 냄비에 익힌 닭가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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