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어제 그 경기 봤어?
[매거진 esc] 너 어제 그 경기 봤어?
박주영과 함께 C급 아니라는 사실 재확인
‘양박’이 워낙 잘하니 K리그에도 반사이득 9월 시원한 두 골이 터졌다. 지난 추석 박주영이 프랑스 진출의 첫 골문을 두드렸고, 21일 새벽엔 맨유 박지성이 첼시를 상대로 멋진 골을 터뜨렸다. 박주영은 ‘모나코의 신성’으로, 박지성은 ‘맨유의 구세주’로 유럽 축구의 아시아 영웅으로 주목받고 있다. <스포탈 코리아> 서형욱 편집장(사진 오른쪽)과 서호정 기자가 박지성과 박주영의 활약, 국내 케이(K)리그 판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서형욱(이하 욱) 21일 맨유-첼시 경기에 박지성이 뛴 건 의외였다. 주중에 계속 경기를 뛰었기 때문에 출전하리라 예상 못했다. 첼시와의 경기에 선발로 나온 적도 없었고. 골이 비록 아주 멋있게 들어가진 않았지만 박지성이니까 성공시킬 수 있는 골이었다. 끈질기게 따라가서 집중했고 기어이 성공했다. 서호정(이하 정) 박지성이 속한 맨유 입장에서 보면 이번 경기는 운명을 건 승부였다. 시즌 개막전에서 이기긴 했지만 이후 성적이 안 좋았다. 프리미어리그 우승은 빅4(맨유, 첼시, 아스널, 리버풀)끼리의 피 튀기는 싸움 아닌가. 맨유는 리버풀과의 경기에서도 역전패를 당했다. 맨유가 1승1무1패 14위의 상황에서 첼시에 졌다면 경쟁에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거다. 욱 퍼거슨에게 있어서 주전 11명은 폭넓은 개념이다. 박지성을 ‘벤치성’이니 ‘땜빵’이니 말하는데, 표현법이 그래서 그렇지 박지성은 인정받고 있다. 단 지난 시즌에 비해서 공격수 베르바토프가 가세해 주전 경쟁이 심해졌다. 이번 첼시전에서 골을 넣었지만 아직 상황이 크게 바뀐 건 아니다. 21일 경기만 봐도 호날두, 테베즈 같은 선수들이 벤치에 있더라. 퍼거슨이 생각하기엔 누구나 벤치에 앉을 수 있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탈락이 준 자극
정 경쟁자인 긱스, 나니, 박지성, 이 셋이 한 포지션을 두고 경쟁한다. 박지성은 강한 수비력, 나니는 뛰어난 기술, 긱스는 영국 축구의 상징적인 존재라는 게 강점이다. 이번 박지성 골 장면을 보고 많은 팬들이 ‘주워먹은 골’이라고 표현한다. 나도 그 순간 박지성이 그 자리에 있을 거라 생각 안 했다. 순간적으로 스위칭을 했는지, 그 전에 분명히 공격이 들어왔을 땐 후방에 있었는데, 갑자기 공격에 나섰더라. 이번 골은 주워먹기가 아니라 경기장 전역을 누비며 헌신하는 박지성만의 능력이다.
욱 한국 축구의 구세주라고나 할까. 본인도 아직까지는 2007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엔트리에조차 끼지 못했던 쇼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하더라. 그 경기를 직접 해설했는데 경기 전 명단에 박지성이 없는 걸 보고는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게임에서 맨유가 우승하지 않았나. 작년 결승전에 출전하지 못했던 게 박지성에겐 자기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한 동기부여가 되었던 것 같다.
정 박지성에 대한 팬들의 몇 가지 왜곡된 인식이 있다. 강팀과의 경기에서 박지성은 벤치에 앉는다는 게 대표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영국에서도 그에 대한 관심이 상당하다.
욱 스타 축구선수에게 어떤 이미지가 붙으면 그게 축구경기장을 넘어 많은 이들에게 따라다닌다. 박주영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60년에 한 번 나올 애다’, ‘천재’라고 했다. 박지성은 일단 테크니션도 아니고, 골을 많이 넣는 선수도 아니기 때문에 천재라고 불리지는 않았지. 대부분 천재라는 딱지가 붙으려면 일단 공격수여야 한다. 박주영은 프랑스에 가자마자 골을 넣어 멋진 데뷔전을 치렀다. 사실 많은 이들이 큰 기대를 안 했다. 한국에 있을 때 워낙 슬럼프가 길었으니까.
정 한국 언론에서만 난리가 아니라 프랑스 언론에서도 난리가 났었다. 이 아이가 누구냐. 아시아의 바조다, 모나코의 새로운 희망이라고 말했다. 한국 선수가 유럽에 진출할 때마다 축구 선배들이 하는 말이 있다. 일종의 십계명인데, 첫 경기에서 강한 인상을 심어주라는 거다. 강한 인상을 심는 선결조건은 공격수나 미드필더 상관없이 골을 넣는 거다. 하지만 그걸 달성한 선수는 없었다. 설기현이 프리미어리그 데뷔에서 골 성공 어시스트를 했고. 이천수도 어시스트였고, 이동국은 골대를 스쳤을 뿐이었다. 첫 골 하나가 동양인 선수에 대한 인식을 얼마나 바꿔놓는지, 괴력은 대단하다. 동양에서 온 ‘C급’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각인시키니까.
골 DNA가 천재 골잡이를 만든다
욱 흔히 공격수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난다고 한다. 몸값도 가장 높다. 공격수들은 정글과도 같은 경기장 박스 안에서 반응하고 빨리 결정해야 한다. 결정의 순간 긴장하지 않고 승부를 거는 걸 ‘골 디엔에이’라고 부른다. 이건 몸에 박혀서 태어나지 않으면 만들기 어렵다. 최근 1~2년간 박주영의 최대 강점인 빠른 순발력이 잘 발휘되지 않았는데 이번에 그 강점이 유효하다는 걸 보여줬다. 어느 인터뷰에서 귀네슈 감독이 박주영은 웬만한 걸 다 이뤄본 선수라고 말하더라. 적절한 시점에서 티핑 포인트가 되었다.
정 박지성, 박주영 두 선수가 워낙 잘해 주니까 케이리그에도 반사 이득이 왔다. 올해부터 케이리그는 야구를 의식해서 정규리그가 끝난 뒤 6강 플레이오프라는 포스트 시즌 성격의 경기를 진행한다. 예년에 비해 수도권을 연고로 하는 수원·성남·서울이 치고 나가는 소위 3에스(3S)의 시대가 왔다. 3에스는 다른 11개 팀에 비해서 자본 동원력이 막강하고 팀 이미지도 강력하다. 실력이 출중한 선수들이 뛰는데 서울이 국가대표 김치우를, 수원이 이천수, 성남이 이동국을 데려갔다. 이 세 팀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이 관전 포인트인데, 전반기 수원이 앞서 나가며 독주 체제를 구축하다가 7월 들어선 서울·성남에게 연이어 졌다. 수원이 휘청거리는 사이 성남이 나와서 뒤엎었고 최근 2주 사이 서울이 열두 경기 연속 이기고 있다.
욱 이렇게 절대강자들이 존재하게 되면 약한 팀들은 한 번 강팀을 이기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꼴찌 팀들이 중상위권 팀을 이기면 미친 듯 즐거워할 수 있으니 말이다. 각 팀들이 실력 차이가 난다면 그 레벨에 맞는 승부를 보는 재미가 있다. 이게 최근 케이리그가 변화하는 하나의 긍정적인 징표다.
정 7월에 대전이 수원을 1:0으로 이겼는데 대전 관계자가 ‘우리는 큰 목표 하나 이뤘다’ 말하더라. 이런 팀은 수원 같은 강팀을 한 번 이긴다는 현실적인 눈높이를 갖고 있는 거다. 올해 성적도 세 팀이 상위권에 있고 나머지 많은 팀들이 허리를 구성한다. 6강 플레이오프에서 4~6위를 두고 7~8개 팀이 강하게 맞붙으니까 우승경쟁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황선홍 등 젊은 감독들에게 거는 기대감
욱 예전에 1등만 강조했다면 지금은 나름의 길을 가며 즐기겠다는 마인드가 보인다. 승부도 중요하지만 자기 팀이 가진 강점을 활용해 좀더 화끈한 경기를 하는 쪽으로 가려는 감독들이 늘고 있다. 지금 케이리그 국내 공격수 득점 순위를 보면 1, 2위가 대구팀 소속 장남석과 이근호다. 우승을 노리는 팀은 아니지만 골이 많이 터지는 기대감을 주는 팀이니 즐겁다.
정 결과만 보는 좁은 시야의 축구에서 벗어나고 있다. 선수들과 지도자들도 어중간한 경기를 하기보다 홈팬들 앞에서 뭐 좀 보여주자고 한다. 황선홍 같은 젊은 감독이 이끄는 부산팀이 특히 잘하고 있다. 전반기에 성적은 안 좋았지만 수비를 강화한다고 골을 안 먹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그들이 원하는 축구를 하겠다고 하더라. 요새 좋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정리 현시원 기자 qq@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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