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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을 푸근한 찻집으로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거실을 푸근한 찻집으로
집은 사람을 드러낸다. 당신의 거실에는 무엇이 있는가?
누군가의 집에는 대형 벽걸이 텔레비전과 서라운드 음향 시설이 있을 것이다. 그는 매일 저녁 7시 퇴근한 뒤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몸을 파묻는다. 리모컨을 켜고 영화를 틀면 그때부터 자기만의 세상이 열린다. 이 거실이 드러내는 당신은 영화에 탐닉하는 예술가다. 누군가의 거실에는 대형 텔레비전 브라운관과 플레이스테이션이 연결돼 있다. 그는 퇴근 뒤 넥타이를 풀자마자 게임기의 전원을 켠다. 빈 거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조이스틱을 쥐고 권투를 하듯 주먹을 흔들거나 혼잣말을 외치며 축구를 하는 게 즐거움이다. 또 누군가의 집에는 그저 텔레비전만 한 대 있다. 가족들과 대화 없이 텔레비전만 본다. 이 모든 ‘중생’을 비웃으며 서재로 꾸민 거실에서 책을 뽑아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번주 〈esc〉가 찾아간 두 사람은 거실을 꾸미는 선택지에 하나를 더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의 거실에는 텔레비전도, 게임기도, 오디오도 없었다. 심지어 서재도 없었다. 대신 작은 차탁과 몇 개의 다기가 있을 뿐이었다. 은은한 갈색 색감을 띤 몇 개의 소도구로 그들의 거실은 금세 찻집으로 변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거실 콘셉트를 ‘찻집’으로 잡았다. 이들의 표어는 ‘거실을 찻집으로’다. 아직도 사람들은 ‘차’라는 단어에서 ‘50~60대가 즐기는 마실거리’를 떠올린다. 정말 그게 사실일까? 그런데 이들 20대와 40대 중반의 직장인들은 왜 차를 마실까? 이런 질문이 떠오르는 독자는 딱 5분 만 〈esc〉를 펼쳐도 좋을 것 같다. ‘다도’나 ‘선불교’와 상관없어 보이는 이들이 왜 차를 마시는지 알 수 있다. 차에 입문한 지 아직 얼마 안 된 싱글 ‘하수’와 가족과 함께 차를 즐기는 ‘고수’의 거실을 각각 엿봤다. 그들의 거실문을 열어 보자.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대화의 행복이 가득한 집을 위하여
‘아직 초보’ 송유설씨와 ‘약간 고수’ 하변길씨가 거실을 찻집으로 바꾼 이야기
얼마 전 오후 3시 찾아간 대학원생 송유설(28)씨의 원룸은 조촐했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 서울대입구역 부근 15평 남짓한 방은 스물여덟 살 여성의 방치고는 장식이 없는 편이다. 햇빛이 비치는 책상 옆에 수반과 다기가 놓여 있다.
지금은 심리학과 대학원생이지만 송씨는 2007년 초까지만 해도 샐러리맨이었다. 2005년 산업은행 홍보실 사보팀에서 근무하던 시절 처음 보이차를 접했다. 송씨가 근무하는 홍보실의 주된 업무 가운데 하나는 기자들과 만나는 일이다. 그래서 업무는 종종 술자리로 이어진다. 사보팀인 송씨는 그 ‘전쟁터’에 직접 나가지는 않았지만, 동료가 아침마다 쓰린 속을 부여잡는 모습을 지켜봤다. 홍보팀원들은 해장용으로 보이차를 애용했다. 둥근 알 모양의 ‘타차’였다. 송씨는 보이차 맛을 본 뒤 단번에 깊은 맛에 빠져들었다. 원래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녹차를 마시던 송씨의 입맛에 그만이었다.
송씨는 홍보실에서 처음 차를 접한 뒤 본격적으로 차와 친해 보고 싶어 서울 강남의 한 찻집을 찾았다. 그 찻집에서는 5시간 동안 좋은 차를 계속 마시는 일종의 차를 이용한 ‘해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5시간 동안 차를 마시면서 송씨는 마치 술 취한 것 같은 경험을 했다.
정신에는 좋지만 지갑에는 좋지 않다?
“특별히 기자님을 위해서 제가 가진 차 가운데 가장 좋은 걸로 드릴게요.” 약간 긴장된 눈빛으로 수반(흐르는 찻물을 밑에서 받치는 그릇)을 들어 방 한가운데 놓고 포트에 물을 끓였다. 밥상으로 겸용하는 탁자를 펼쳐 그 위에 수반을 놓는다. 수반 옆에 찻잔을 놓고 수반 위에는 차호(찻주전자)를 놓았다. 물이 끓자 수반 위에 놓인 차호 뚜껑 위로 뜨거운 물을 붓는다. 뚜껑을 열지 않는 것은 차호 뚜껑 위에 조그만 구멍이 있기 때문이다. 옆으로 흘러 넘치는 물은 수반 밑으로 빠져든다. 차탁 하나를 폈을 뿐인데, 방은 찻집이 된다.
처음 우린 물을 버린 뒤 본격적으로 차를 마신다. 송씨가 내온 차는 무이암차. 송씨가 건넨 찻잔을 받고 향기를 맡은 뒤 조금 입에 넣었다. 흙냄새가 입안을 채웠다. 기분 나쁘게 텁텁한 흙맛이 아니었다. ‘이런 흙이라면 밥 대신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쾌한 느낌이었다.
차를 마셔서 좋은 점으로 송씨는 몸이 좋아진 것을 첫째로 꼽았다. 달마다 괴롭히던 생리통이 차를 마시면서 잦아들었다고 한다. 그다음으로는 “정신이 이완되는 느낌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겉으로는 직장 생활보다 편해 보이지만, 대학원도 치열한 경쟁과 자기와의 싸움이 벌어지는 ‘전쟁터’다. 송씨는 거의 매일 학교에서 돌아온 뒤 1.5ℓ 생수 한 통 분량씩 차를 마신다. 수반으로 빠지는 물을 제외하고도 거의 1ℓ를 마시는 셈이다.
좋은 차는 몸에 좋고 정신에 좋지만 가끔 지갑에는 좋지 않다. 송씨는 100g에 60만원짜리 보이차를 여섯 달 할부로 샀다. 깊은 맛에 취해 여섯 달치를 한 달 만에 다 마셔버렸다. 차는 없는데 다달이 찻값을 내야 하는 다섯 달을 견디며 송씨는 ‘아~내가 이번엔 좀 무리했구나’라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조금 무리해서 40만원대 차호 구입
“틱 증상에 효험” 듣고 반신반의 차 입문
차를 즐기지 않는 젊은이들은 ‘차’라는 말에서 무엇을 떠올릴까? 아마 ‘50·60대’ ‘명상’ ‘지루함’ ‘선불교’ ‘다도’ ‘어려운 것’이라는 단어를 연상할 것 같다.
직장인 하변길(44)씨는 이런 선입견을 깬다. 그는 40대 중반이며 연립주택에 사는 평범한 직장인이고, 한창 자라나는 초등학생 아들딸이 있다. 불교를 믿지도 않고 집은 복작거리는 경기도 성남 복판에 있다. 이들 네 가족에게 차 마시는 일은 명상보다 시끌벅적한 대화와 어울린다.
특공무술을 배우는 딸 예린(10)에게 특히 그렇다. 초등학교 4학년인 예린이는 학기 중에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면 먼저 물을 끓이고 거실 가운데 놓인 차탁에 앉는다. 수반 앞에는 예린이가 앉고 그 앞에 친구들이 앉는다. 예린이는 엄마의 어깨너머로 배운 솜씨로 능숙하게 차를 우린다. 차호 위에 물을 붓고 넘치는 물은 차붓으로 쓸어낸다. 그 사이에도 친구들과 자신들을 괴롭히던 옆반 남자애 얘기며 어렵기 짝이 없었던 수학숙제에 대해 수다를 푼다. 차를 다 마시고 난 뒤에는 친구들 앞에서 차호를 씻는 ‘양호’도 한다. 10살 소녀들에게 차 마시는 것은 다도가 아니라 소꿉장난 같은 재미다.
부인 김영희(40)씨는 2005년 아들 명훈(12)의 틱증상(아이가 눈 깜빡이기 등 의미 없는 반복적인 행동을 하는 것)에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반신반의하며 차에 입문했다. 차 한 종류와 차호 1개를 ‘질렀다’. 차호는 30만원짜리로 크게 비싸다고 하기 어려웠지만, 하씨의 성화에 못 이겨 다음날 15만원짜리로 바꿨다. 그러나 그 다음날부터 차를 맛본 하씨는 금세 급진적 차 옹호자로 ‘전향’했다.
하씨의 집은 성남시 수정구의 연립주택 건물 3층이다. 연립주택이 빼곡히 들어찬 건물을 헤집고 3층 문을 여는 순간, 좁은 곳에서 넓은 곳으로 나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찻집 분위기로 꾸민 거실 때문이었다. 하씨는 15평 남짓한 거실에 있던 텔레비전을 안방으로 옮겼다. 대신 거실 한가운데 차탁을 놓고 그 위에 차호, 다기, 수반을 항상 놓아두었다. 차탁 옆에는 일반 책장을 옆으로 눕혀 찻잔과 다기를 정리해 놨다. 넘치는 다기들은 큰마음 먹고 장만한 네 칸 높이의 나무틀에 정리했다. 나무의 황토색 색과 질감은 짙은 갈색의 차호와 잘 어울렸다.
그러나 하씨의 거실은 일상과 분리된 공간이 아니다. 불교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그의 거실은 피안(사바세계 저쪽에 있는 깨달음의 세계)이 아니라 차안(나고 죽고 하는 고통이 있는 이 세상)이다. 그래서 거의 거실은 먹는 일을 담당하는 싱크대가, 자는 일을 담당하는 침실이, 싸는 일을 담당하는 화장실이 막힘 없이 이어져 있다.
하씨는 거실을 찻집으로 바꾸고 얻은 가장 큰 행복을 대화로 꼽았다. 하씨는 평균 일주일에 두세 번 저녁때 가족들과 차를 함께 마신다. 야근이 잦은 하씨를 빼고 부인 김씨와 자녀는 거의 매일 함께 차를 마신다. 공명가족상담센터 부소장인 김씨는 아이들과 이야기할 때 책에서보다 더 많은 걸 배운다. 이들의 대화 기록은 일기나 녹음기가 아니라 차호에 기록된다. 각자 두 개 정도 전용 차호가 있다. 자기 차호에는 ‘풍만이’처럼 이름도 지어준다. 각각의 차호를 보면 언제 어떤 대화를 나눌 때 마신 차인지 금방 떠올릴 수 있다. 가족사진이나 다름없다.
차호만 11개…외식비 등 여가비용 줄여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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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을 푸근한 찻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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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한 갈색 색감을 띤 몇 개의 소도구로 그들의 거실은 금세 찻집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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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한 갈색 색감을 띤 몇 개의 소도구로 그들의 거실은 금세 찻집으로 변했다.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대화의 행복이 가득한 집을 위하여
‘아직 초보’ 송유설씨와 ‘약간 고수’ 하변길씨가 거실을 찻집으로 바꾼 이야기
송유설씨의 조촐한 원룸은 차 향기로 향긋하다.
보이차의 한 종류인 칠오사이차.
작은 수반 하나면 차를 늘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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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로 끈끈한 가족사랑을 실천하는 하변길씨(맨 오른쪽)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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