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 6일 서울 세종로 촛불집회를 취재하는 인근 빌딩 옥상의 사진기자.
[매거진Esc]
거리집회 현장의 영원한 참여자이자 이방인, 사진기자들의 애환
6월5일 밤 9시께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 20~30명이 골목을 막은 전경버스 앞에 서 있다. 전경버스 바퀴를 단단한 흰색 밧줄로 묶고 끌 준비를 한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전경들의 “얍”, “얍” 기합 소리가 위압적인 메아리로 퍼진다. “×××야”, “비폭력” 고함소리와 함께 막으려는 전경들과 차를 끌려는 시민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진다. 거친 숨소리와 투박한 기운이 아스팔트를 점령한다. 곧 아수라장이 된다. 그 찰나 번쩍 번쩍 플래시가 터진다. 사진기자들이다. 불나비처럼 아수라판에 뛰어든다.
한여름 마천루의 저격수들
6월5일 저녁 8시께 20층이 넘는 마천루 빌딩 옥상. 한겨울 같은 서늘한 추위가 빌딩 위에 모인 예닐곱의 사람들을 덮친다. 몇 명은 난간조차 없는 곳을 성큼성큼 걸어간다. 삐끗하면 그야말로 황천길이다. 그들은 빌딩 아래 시청 앞 흔들거리는 촛불들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댄다. 영화에 등장하는 저격수의 모습이 이와 같지 않을까. 누구는 어두운 하늘을 탓하며 삼각대를 세운다. “선배 오랜만입니다” “아스팔트 오랜만이네” 사진기자들이다.
몇 달 전부터 이어지는 거리 촛불시위에서 커다란 카메라 가방을 메고 노란 완장을 두른 사진기자들을 만난다. 사진기자들은 흔히 집회나 시위 취재를 ‘아스팔트 나간다’고 말한다. 아스팔트 위에 열기가 달아오르고 식을 때까지 셔터를 누른다. 6·10 항쟁, 반미 집회, 5·18 집회, 노동자대회, 농민집회, 에프티에이 반대 집회 등 세계 어느 나라보다 대한민국은 집회와 시위가 많은 나라다. 그런 탓에 사진기자 취재현장의 3할은 이런 현장들이다. ‘아스팔트’ 취재는 한국의 사진기자라면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일이다. 집회와 시위의 역사가 긴 만큼 그곳에서 자신의 청춘을 불태웠던 사진기자들의 이야기가 수백 개의 촛불처럼 빛난다. 대한민국의 사진기자는 한국사진기자협회 소속 478명(2007년 기준)이다. 그중에서 사회적 이슈를 다루지 않는 여성지나 스포츠, 레저를 취재하는 신문 등의 사진기자들을 빼면 실제 ‘아스팔트’에 카메라를 들고 나서는 이들은 전국적으로 일간지와 시사잡지 기자 381여명 정도다. 사진기자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은 때로 몇 마디 글자보다 강한 힘을 가진다. 6·10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연세대 이한열군의 사진(정태원 당시 <로이터> 사진기자)은 아직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사진기자들은 사건을 이해하는 균형 잡힌 시각,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귀담아듣는 능력,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한 행동이 요구된다. 취재에 앞서 사진기자들은 언제, 어디서, 몇 명이 어떤 내용으로 시위를 하는지, 이번 취재에 ‘유모차 등장’ 같은 특이한 일이 벌어지는지 철저한 조사를 한다. 사전에 입수한 정보는 취재 동선을 짜는 데 유익하다.
꼼꼼하게 장비를 챙겨 취재현장에 나가는 사진기자들이 어떤 사진을 찍는지 알아보자.
반드시 찍는 사진 중 하나는 집회 참가자들의 규모를 보여주는 전경 사진이다. 규모는 뉴스가 된다. 시위대의 전체 풍경이 잘 보이는 높다란 빌딩을 겁도 없이 찾아 올라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1987년 7월9일 ‘이한열 열사 장례식’ 전경 사진은 참여 시민 수를 단박에 보여주었다. 당시 <한국일보> 기자로 현장에 있었던 고명진(56) <뉴시스> 사진영상국장은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87년에 정부는 높은 건물에 올라가서 사진 찍는 것을 막았다. 고씨는 외신기자 한 명이 지금의 국가인권위원회 건물에 쑥 들어가자 따라 올라갔다. 경비원이 영어를 못해서 막지 못했다고 하자 고씨는 그를 데려 내려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그곳에 올라갔다. 따라나선 경비의 눈을 피해 딱 두 컷만 찍고 내려왔단다. 당시 권력은 다수가 모이는 것에 대한 기록 자체를 가로막았다. 보도지침이 있던 시절, 사진기자들은 시민들에게 야유와 고함도 들었다. 사진기자들의 가슴에 더 큰 멍이 들었다.
행진이 시작되면 체력과의 싸움
시위대의 강한 표정을 담은 클로즈업 사진도 흔히 찍는 앵글이다. 망원렌즈를 쓰기도 하고 광각렌즈를 끼고 구호를 외치는 이의 코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한다. 그들의 주장을 더 분명히 표현하려는 생각이다. 구호를 외칠 때, 불끈 쥔 주먹을 올릴 때 카메라를 든다. 먹이를 찾아 헤매는 승냥이처럼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하이 앵글, 로 앵글, 독특한 시각을 찾아 아스팔트를 누빈다.
시위대가 행진을 시작하면 이제부터는 체력과의 싸움이다. 시위차량에 올라타(시위차량은 시위대보다 먼저 움직인다) 걸어오는 시위대를 향해 셔터를 누르는 사진기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함께 뛰고 걷는다. 80년대 폭력적인 진압이 있던 시절에는 사진기자는 사다리, 카메라, 방독면, 헬멧 등을 이고 지고 마치 외계인처럼 거리를 달렸다.
‘아스팔트’ 취재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시민과 경찰의 물리적 충돌이 생기는 때다. 충돌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사진을 찍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시위대와 경찰 사이 틈새에 끼여 화염병과 최루탄을 고스란히 맞기도 했다. 양측 모두 사진기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91년 강경대 치사사건을 취재하던 한 사진기자는 경찰이 세운 바리케이트 위에서 사진을 찍다가 시위대가 바리케이트를 당기는 바람에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시위 현장에서 경찰들은 사진기자들에게 노골적인 압력과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과거 80년대 진압경찰들은 사진기자들을 향해 물대포나 최루탄을 직접 쏘기도 했다. 사진기자들이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 두려움에 위축되는 효과를 보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87년에 <한국일보> 사진기자였던 김건수(51)씨는 시위 중 백골단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다 봉변을 당했다. 백골단이 그의 취재를 막기 위해 사과탄(시위 진압용 최루탄의 일종) 20개를 쏘았고 그중 하나가 가랑이 사이에 터졌다. 장가는 다 갔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 깊은 좌절을 맛보기도 했다. 다행히 양쪽 허벅지만 다치는 상처를 입었다.
아직도 경찰은 사진기자들의 취재를 방해한다. 지난 6월1일 <한겨레> 박종식 기자는 장비 일부가 파손되고 안경이 깨지는 수모를 겪었다.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시위 취재의 방향이 어떤 식으로 변할지 모른다. 위험도가 더 높아지기 때문에 순발력과 예리한 관찰력이 사진기자에게 필요하다.
격렬한 시위 취재일 수록 사진기자들 끼리의 몸싸움도 불가피하다. 하지만 ’아스팔트’에서 얼굴을 익힌 사진기자들은 서로에 대한 존중의 미학을 발휘한다.
선배 골탕 먹이기에 ‘망원 렌즈’ 연분도
시위가 많았던 80년대 사진기자들은 서늘한 경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시는 여러 번 나눠서 여는 시위 장소를 먼저 아는 것이 중요했다. 시위 장소는 비공개였고 중요한 정보였기 때문에 스파이와 같은 정보수집 능력도 필요했다. 같은 현장에서 매일 보는 사진기자 몇 명은 유난히 순진한 선배 사진기자를 놀리기도 했다. “선배 다음 장소는 ○○백화점 앞이랍니다”라고 작은 소리로 일러주면 그 선배 사진기자는 후다닥 사라진다. 남은 사진기자들은 잠시 후 그 선배의 연락을 받는다. “여기 아무도 없어. 아직 안 온 거야?” 거짓 정보를 듣고 바람같이 사라지는 선배 모습이 우스웠단다. 번번이 속아 넘어가는 선배를 보면서 최루탄 자욱한 ‘아스팔트’ 위에서 취재 수고를 풀기도 했다.
시위 취재 현장에서 ‘눈이 맞는’ 경우도 있다. ㅎ신문 여자 사진기자와 o 인터넷신문 사진기자가 그런 예다. 훌륭한 사진을 찍기 위해 아스팔트에서 뛰어다니는 모습을 망원렌즈로 서로 찍어주다가 사랑이 싹텄다. 힘든 취재 현장의 수고와 땀이 사랑의 밑받침이 되었다.
오늘도 촛불집회에서 그들을 만난다. 집회 현장의 영원한 참여자이자 이방인이지만, 그들이 찍은 사진들은 역사에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몇 달 전부터 이어지는 거리 촛불시위에서 커다란 카메라 가방을 메고 노란 완장을 두른 사진기자들을 만난다. 사진기자들은 흔히 집회나 시위 취재를 ‘아스팔트 나간다’고 말한다. 아스팔트 위에 열기가 달아오르고 식을 때까지 셔터를 누른다. 6·10 항쟁, 반미 집회, 5·18 집회, 노동자대회, 농민집회, 에프티에이 반대 집회 등 세계 어느 나라보다 대한민국은 집회와 시위가 많은 나라다. 그런 탓에 사진기자 취재현장의 3할은 이런 현장들이다. ‘아스팔트’ 취재는 한국의 사진기자라면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일이다. 집회와 시위의 역사가 긴 만큼 그곳에서 자신의 청춘을 불태웠던 사진기자들의 이야기가 수백 개의 촛불처럼 빛난다. 대한민국의 사진기자는 한국사진기자협회 소속 478명(2007년 기준)이다. 그중에서 사회적 이슈를 다루지 않는 여성지나 스포츠, 레저를 취재하는 신문 등의 사진기자들을 빼면 실제 ‘아스팔트’에 카메라를 들고 나서는 이들은 전국적으로 일간지와 시사잡지 기자 381여명 정도다. 사진기자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은 때로 몇 마디 글자보다 강한 힘을 가진다. 6·10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연세대 이한열군의 사진(정태원 당시 <로이터> 사진기자)은 아직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사진기자들은 사건을 이해하는 균형 잡힌 시각,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귀담아듣는 능력,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한 행동이 요구된다. 취재에 앞서 사진기자들은 언제, 어디서, 몇 명이 어떤 내용으로 시위를 하는지, 이번 취재에 ‘유모차 등장’ 같은 특이한 일이 벌어지는지 철저한 조사를 한다. 사전에 입수한 정보는 취재 동선을 짜는 데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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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농민시위 현장에서 물대포를 맞는 농민들. 사진기자도 물벼락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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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촛불집회 전경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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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24일 한미 FTA저지 시위를 취재하는 사진기자들. 취재지점이 중요하다. 사진 강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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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7월 이한열 장례식 전경. 사진 고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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