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늘 아슬아슬한 진행자와 함께 ‘색깔있는 라디오’ 들려준 CBS 정혜윤 PD
[매거진 Esc] 도대체 누구야?-PD열전
늘 아슬아슬한 진행자와 함께 ‘색깔있는 라디오’ 들려준 CBS 정혜윤 PD
무심코 라디오를 켰는데 주파수를 잘못 맞춰 엉뚱한 프로그램이 흘러나온 것처럼, 인터뷰는 밑도 끝도 없이 프랑스 작가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소설 <작은 보석> 얘기로 시작됐다.
“한 여자가 있어요. 그 여자는 어릴 때 자신을 ‘작은 보석’이라고 불렀던 엄마에게서 버림을 받죠. 그 여자가 어른이 된 뒤 파리에서 우연히 죽은 줄로만 알았던 엄마를 우연히 보게 되면서 소설은 시작해요. 소설 속에서 그 여자가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나요. 그 남자의 집에 갔는데 그곳에는 라디오가 있어요. 그 남자는 전세계 라디오를 듣고 번역하는 사람인 거예요. 라디오를 듣고 그 얘기를 써서 여자에게 줘요. 그 소설을 읽고 라디오가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소통이 필요한 사람들이 비록 다른 세계에 살지만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게 라디오잖아요. 왜 피디가 됐느냐고 물어보면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 있겠지만, 저는 무엇보다도 이 소설이 떠올라요.”
외모도 색깔이 짙답니다
확인해보니 주파수는 기독교방송(CBS) 정혜윤 피디에 잘 맞춰져 있었다. 어쨌든, 다행이다. 10년이 넘도록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어온 정혜윤 피디는 ‘특별한’ 혹은 ‘독특한’ 등의 형용사와 함께 하기로 유명하다. 그가 연출한 프로그램은 항상 남다르고, 그의 사고방식은 단순과 비범 사이를 넘나들고 있으며, 그의 외모는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색깔이 짙다.(까만 피부에 빨강·노랑·분홍색 원피스, 이 정도면 충분히 짙다.)
정 피디가 연출한 프로그램 중에는 <최보은의 서울에서 평양까지>, <김어준의 저공비행>,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등 한 번쯤, 아니 두 번 이상 논란이 됐던 프로그램들이 꽤 많다. 지금은 아침 프로그램 <매거진 오늘>과 금태섭 변호사가 진행하는 토요일 프로그램 <뉴스레이다 스페셜-책과 문화>를 만들고 있다. 라디오 피디가 되는 사람들은 대략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음악 프로그램을 들으며 자라온 라디오 마니아인 이들과 라디오라는 매체를 통해 얘기를 하고 싶어하는 이들이다. 정 피디는 100% 후자다. “저는 라디오걸이 아니었어요. 라디오는 저에게 그저 기계 장치에 불과했죠. 그러다가 어느 날 기독교방송 시험에 덜컥 붙어서 라디오 피디가 되어버린 거예요. 처음에는 두려웠어요. 어떻게 말이 이 작은 박스에서 나오는지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전파론까지 공부했다니까요.”(웃음) 라디오를 뜯어보며 라디오 피디를 시작한 그가 한 가지 다짐을 한 게 있다. 라디오 자체에 대해 어렵게 알게 된 것처럼 5년차가 될 때까지는 모든 것을 쉽지 않게, 어렵게 배우자는 다짐이었다. 시간이 흘러 정 피디 자신이 단독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하게 된 공식적인 ‘첫 방송’의 날이 왔다. 광복절 남북축전 관련 프로그램이었다. 방송 시간은 20분 남짓. “제가 살면서 가장 부끄러웠던 순간이 그때에요. 제가 만들었지만 들어줄 수가 없는 거예요. 지금까지 선입견과 예단에 의해 방송을 만들어버린 거죠. 새롭게 뭔가를 보려고 하지 않고 예측 가능한 대로, 지금까지 늘 해왔던 콘티대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그때 이대로 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첫 방송에서 ‘대오각성’한 그는 다음부터 늘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 애썼다. 정 피디가 만든 라디오 프로그램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유독 질문이 많다는 점과 진행자가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질문이 많은 이유는 간단하다. 궁금한 게 많으니까. 정 피디가 라디오 피디라는 직업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궁금한 점에 대해 가장 잘 대답해 줄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는 아는 게 많이 없잖아요. 그렇지만 제가 모르는 것을 사람들을 통해 들을 수 있죠. 모든 사람들은 적어도 한 가지만큼은 저보다 뛰어나거든요. 사람들이 들려주는 새로운 세계가 너무 재미있어요. 그런 질문과 대답을 통해 제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게 좋아요. 또 그 세계가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일어나는 반응도 흥미로워요. 그래서 지금까지 한 번도 음악 프로그램에 가지 않고 시사·정보·교양 프로그램만 만들었어요.” 진행자가 만만치 않은 이유는 사람의 시선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디오 프로그램은 어떤 진행자와 어떤 피디가 어떤 기획 의도로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김어준과 최보은, 공지영 등 그와 함께 이슈를 만들어낸 진행자들은 모두 아슬아슬하지만 자기만의 시선을 가진 매력적인 인물들이다. “제게 충격과 자극을 주는 진행자, 색다른 시선과 말로 그 사람의 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진행자가 가장 좋아요. 지금까지 함께 한 진행자들 대부분 제게 희열을 안겨줬죠. 제가 할 일은 이들에게 가장 적합한 아이템을 주고, 더 보여달라고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거예요. 뛰어난 논객만 있다면 라디오는 황홀한 매체임에 틀림없어요.” 소의 입김은 딸 수 없는 걸까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한계와 경계를 허물어버리며 라디오가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개척해왔지만 정 피디는 여전히 불가능한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한번 소를 키우는 사람을 취재 간 적이 있어요. 밤에 그 사람이 키우는 소 앞에 쭈그려 앉아 소 울음소리를 따고 있었는데 소 입김이 하늘로 올라가더라구요. 밤하늘 별에 닿을 것만 같은 그 입김을 따고 싶었어요. 그건 불가능하잖아요. 그런데 녹음한 걸 다시 들으며 한 가지를 깨달았어요. 울음과 울음 사이에 충분한 시간만 주면 사람들이 입김을 볼 수 있다는 거예요. 불가능해 보이지만 불가능하지 않은 거죠. 지금 하고 싶은 것은 여행자들을 위한 라디오예요.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듣는 거죠. ‘그 고개를 넘으시는 분, 45도 옆을 바라보면 저희가 보여요!’ 그런 얘기가 라디오에서 나오면 너무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글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정 피디가 연출한 프로그램 중에는 <최보은의 서울에서 평양까지>, <김어준의 저공비행>,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등 한 번쯤, 아니 두 번 이상 논란이 됐던 프로그램들이 꽤 많다. 지금은 아침 프로그램 <매거진 오늘>과 금태섭 변호사가 진행하는 토요일 프로그램 <뉴스레이다 스페셜-책과 문화>를 만들고 있다. 라디오 피디가 되는 사람들은 대략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음악 프로그램을 들으며 자라온 라디오 마니아인 이들과 라디오라는 매체를 통해 얘기를 하고 싶어하는 이들이다. 정 피디는 100% 후자다. “저는 라디오걸이 아니었어요. 라디오는 저에게 그저 기계 장치에 불과했죠. 그러다가 어느 날 기독교방송 시험에 덜컥 붙어서 라디오 피디가 되어버린 거예요. 처음에는 두려웠어요. 어떻게 말이 이 작은 박스에서 나오는지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전파론까지 공부했다니까요.”(웃음) 라디오를 뜯어보며 라디오 피디를 시작한 그가 한 가지 다짐을 한 게 있다. 라디오 자체에 대해 어렵게 알게 된 것처럼 5년차가 될 때까지는 모든 것을 쉽지 않게, 어렵게 배우자는 다짐이었다. 시간이 흘러 정 피디 자신이 단독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하게 된 공식적인 ‘첫 방송’의 날이 왔다. 광복절 남북축전 관련 프로그램이었다. 방송 시간은 20분 남짓. “제가 살면서 가장 부끄러웠던 순간이 그때에요. 제가 만들었지만 들어줄 수가 없는 거예요. 지금까지 선입견과 예단에 의해 방송을 만들어버린 거죠. 새롭게 뭔가를 보려고 하지 않고 예측 가능한 대로, 지금까지 늘 해왔던 콘티대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그때 이대로 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첫 방송에서 ‘대오각성’한 그는 다음부터 늘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 애썼다. 정 피디가 만든 라디오 프로그램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유독 질문이 많다는 점과 진행자가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질문이 많은 이유는 간단하다. 궁금한 게 많으니까. 정 피디가 라디오 피디라는 직업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궁금한 점에 대해 가장 잘 대답해 줄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는 아는 게 많이 없잖아요. 그렇지만 제가 모르는 것을 사람들을 통해 들을 수 있죠. 모든 사람들은 적어도 한 가지만큼은 저보다 뛰어나거든요. 사람들이 들려주는 새로운 세계가 너무 재미있어요. 그런 질문과 대답을 통해 제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게 좋아요. 또 그 세계가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일어나는 반응도 흥미로워요. 그래서 지금까지 한 번도 음악 프로그램에 가지 않고 시사·정보·교양 프로그램만 만들었어요.” 진행자가 만만치 않은 이유는 사람의 시선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디오 프로그램은 어떤 진행자와 어떤 피디가 어떤 기획 의도로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김어준과 최보은, 공지영 등 그와 함께 이슈를 만들어낸 진행자들은 모두 아슬아슬하지만 자기만의 시선을 가진 매력적인 인물들이다. “제게 충격과 자극을 주는 진행자, 색다른 시선과 말로 그 사람의 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진행자가 가장 좋아요. 지금까지 함께 한 진행자들 대부분 제게 희열을 안겨줬죠. 제가 할 일은 이들에게 가장 적합한 아이템을 주고, 더 보여달라고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거예요. 뛰어난 논객만 있다면 라디오는 황홀한 매체임에 틀림없어요.” 소의 입김은 딸 수 없는 걸까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한계와 경계를 허물어버리며 라디오가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개척해왔지만 정 피디는 여전히 불가능한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한번 소를 키우는 사람을 취재 간 적이 있어요. 밤에 그 사람이 키우는 소 앞에 쭈그려 앉아 소 울음소리를 따고 있었는데 소 입김이 하늘로 올라가더라구요. 밤하늘 별에 닿을 것만 같은 그 입김을 따고 싶었어요. 그건 불가능하잖아요. 그런데 녹음한 걸 다시 들으며 한 가지를 깨달았어요. 울음과 울음 사이에 충분한 시간만 주면 사람들이 입김을 볼 수 있다는 거예요. 불가능해 보이지만 불가능하지 않은 거죠. 지금 하고 싶은 것은 여행자들을 위한 라디오예요.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듣는 거죠. ‘그 고개를 넘으시는 분, 45도 옆을 바라보면 저희가 보여요!’ 그런 얘기가 라디오에서 나오면 너무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글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