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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감옥에서 아빠를 석방하길
[김어준의 그까이꺼아나토미]
당신의 감옥에서 아빠를 석방하길
당신의 감옥에서 아빠를 석방하길
Q 다들 불륜이다 바람이다 해도 어떻게 우리 아빠까지… 미치겠어요
저는 27살이고 도덕적으로 어긋난 행동은 절대 용납 못하는 성격입니다. 사회생활 하다보면 그런 곳 가고 그럴 수도 있다는 남자들의 풍기문란도 전혀 이해 못하는 성격입니다. 그런데 엄격한 부모님 밑에서 자란 제가 몇 달 전 충격을 받고 최근 또 한 번 충격을 받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이렇게 글을 써봅니다. 아빠의 불륜을 알아버렸습니다. 저는 아빠 회사에서 근무하는데 우연찮게 메일을 대신 확인하다가 가정 있는 여자(젊은, 하지만 아이도 초등학생 둘이나 있는)를 만났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싸이로 그 여자를 찾아 가족사진도 봤지만 언니와 전 엄마한테 말하지 않고 그냥 덮기로 했습니다. 메일 내용이 관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여자가 아쉬움을 표현하는 메일이었기에. 그런데 최근 또다른 메일을 보게 됐습니다. 다른 여자였습니다. 아빠의 이중적인 모습에 미칠 것 같습니다. 다들 불륜이다 바람이다 해도 어떻게 이렇게 우리 아빠까지 …. 그렇게 엄격하고 효자이신 아빠도 이러시는데 제가 현재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남친은 믿어야 하는지 …. 도대체 이 사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야 하는지 …. 어느 누구도 믿지 않고 그냥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나요? 미치겠어요.
A 0. 아빠의 불륜이라. 음, 당혹스런 일이긴 하다. 하지만 당신의 진짜 문제는 아빠의 불륜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 그건 엄마의 남자, 문제다. 당신의 문제는 그 사실을 접수하는 당신의 절망이 도를 넘어선다는 데 있다. 왜냐? 보자.
1. 남들은 어떤지 모르겠다. 그러니 내 이야기부터 해보자. 고1, 가을 어느 날로 기억된다. 모친과 여동생이 며칠 외가엘 가고 부친과 나만 집에 남았다. 그날 저녁, 냉장고 반찬 마다하고 부친이 요리를 했다. 어라. 아부지가 고추장에 밥 비비는 이상의 부엌 노동을 하네. 심지어는 무려, 돼지고기까지 볶았다. 거참, 별일일세. 뭐 그렇다고 둘 다 호들갑 떨 성격은 못됐다. 마주 앉아 서로 말 한마디 없이 밥그릇만 비워 가다 거의 마지막 숟가락을 뜨려는 순간, 불쑥, 돼지고기 한 점이 숟가락 위에 올라왔다. 어머나! 이게 뭐야. 고길 얹었어. 아부지가. 세상에. 처음이었다. 기억이 닿는 한.
그 순간, 느닷없이, 깨닫고 말았다. 아, 엄부 모델 이외는 모르는 이 무뚝뚝하고 고지식한 충청도 양반이 자신도 사실은 이렇게 살갑게 아들자식 숟가락 위에 고기 얹어주고 하는 걸 해보고 싶었던 거구나. 마침 아내와 여식도 없으니 권위 상할 일도 없겠다. 그래 직접 요리해 겨우 한 점, 올려 본 거라. 허. 눈물 한 방울, 찔끔, 수저에 떨어졌다. 그렇다고 들킬 순 없는 노릇. 아무 일 없다는 듯 마지막 숟가락 털어넣고 곧장 내 방으로 갔다. 서로, 아무 말 없이. 그리고 부친은 설거지를 시작했다.
지금도 기억한다. 휘파람까지 불며 설거지하던 부친 뒷모습. 난 그 뒷모습에서 난생 처음 내 아버지가 아니라 40대 후반의 한 남자를 봤다. 나의 사회경제적 보호자 혹은 생물학적 부모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개별자로, 난 그 남자를 잘 알고 있다. 한 가정을 책임지며 거기까지 오기 위해 그가 거쳐야 했던 우여곡절과 희로애락의 상당 부분을 목격해 왔으니까. 나는 그 남자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사람의 남자로서 있는 그대로의 그를, 받아들였다. 남들은 어떤지 모르겠다. 내겐 그 순간이었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독립한 것이. 그리고 그날 이후 여태, 부모를 원망하거나 섭섭해하거나 뭔가를 요구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2. 이제 당신 이야길 해보자. 어떻게 이렇게 우리 아빠까지! 도대체 이 사회를 어떻게! 아빠의 몰락과 세계의 붕괴를 등치시키는 당신의 절규. 그런데 말이다. 당신 아빠라는 거, 대수 아니다. 딸이라고 인간에게 초월적 존재가 돼라 요구할 자격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당신 아빠도 그저 자신만의 욕망을 가진 불완전한 한 남자. 당신은 지금 불륜이 아니라 바로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다.
모든 아이에게 아버지는 신화니까. 권위와 규율과 질서의 원형이니까. 어떤 아이에게든 아버지의 세속성과 속물성은 수용하기 벅찬 일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부성신화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스스로 깨뜨리는 과정 없이, 아이가 어른이 되는 법은, 결코, 없다. 그러니 스물일곱에 여전히 그 신화에 포섭돼 있다는 건 일종의 성장지체. 당신의 도덕적 강퍅함 역시 그 부성신화의 요구에 부응하려는 소녀적 강박의 결과.
아빠 불륜을 혐오하는 건 당신 자유다. 맘대로 하시라. 하지만 아빠를 당신 인식의 감옥에서 풀어줘라. 해방은 당신의 것일지니. 어른이, 될지어다. 아멘.
덧붙임 - 아빠의 불륜과 당신 애인의 잠재적 불륜 가능성 사이의 상관관계, 없다. 그런 식의 연관 짓기 자체가 유아적이다. 둘이 같은 합숙훈련이라도 받는 줄 아나.
김어준 방송인
고민상담은 gomin@hani.co.kr
2. 이제 당신 이야길 해보자. 어떻게 이렇게 우리 아빠까지! 도대체 이 사회를 어떻게! 아빠의 몰락과 세계의 붕괴를 등치시키는 당신의 절규. 그런데 말이다. 당신 아빠라는 거, 대수 아니다. 딸이라고 인간에게 초월적 존재가 돼라 요구할 자격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당신 아빠도 그저 자신만의 욕망을 가진 불완전한 한 남자. 당신은 지금 불륜이 아니라 바로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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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고민상담은 go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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