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급호텔 F&B기획팀은 화려해 보이지만 땀과 눈물을 쏟아야하는 직업이다. 왼쪽부터 롯데호텔 김종희씨, 임피리얼팰리스호텔 김영현 주임, 웨스틴조선호텔 김윤정 과장.
[매거진 Esc] 특급호텔 레스토랑에서 메뉴 개발하는 ‘F&B 기획팀’의 눈물 나는 직업일기
모든 화려함 뒤에는 그늘이 있다. 화려해 보이는 직업일수록 이면에는 영광과 기쁨만큼 피·땀·눈물이 흐른다. 따라서 기자는 “눈앞의 저 빛! …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오징어’)이라고 노래했던 시인 유하에게 동의한다. 물론 시인 유하는 이 시가 담긴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를 발표한 뒤 문학보다 화려하게 ‘빛나는’ 영화계로 옮겨갔지만.
한국에서 ‘호텔 레스토랑’은 항상 최고급 식당의 상징이다. 서울 특급호텔의 레스토랑은 세계적인 음식 문화의 유행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메뉴 개발 등 레스토랑을 총괄하는 전문가들이 ‘에프앤비 기획팀’이다. 에프앤비는 ‘푸드 앤 비버리지(식음료)’의 약자다. 요컨대 이들은 한국 식당의 유행을 선도하는 ‘전위’다. 임피리얼 팰리스 호텔 전략기획팀 주임 김영현씨, 롯데호텔 식음 알엔디 김종희씨, 웨스틴조선호텔 식음기획팀 과장 김윤정씨에게 그들의 눈물 나는 ‘직업일기’를 들어봤다. 기자는 동병상련을 느꼈다. 그들의 노동도 ‘취재’였다.
눈에 보이는 모든 바에 들어가라
지난해까지 에프앤비 코디네이터로 일했던 ‘새신랑’ 김영현씨는 지난해 ‘조이바’ 개업을 도맡으며 신혼의 아내에게 눈총을 받아야 했다. 당시 임피리얼 팰리스 호텔은 젊은 층을 타깃 삼아 세련된 음악과 인테리어가 특징인 ‘라운지바’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김씨의 ‘술노동’이 시작됐다. 당시 한국에는 라운지바가 거의 없어 캐나다에서 라운지바의 인테리어와 메뉴, 안주 등이 소개된 소책자, 전문 칵테일 책 등 100권 이상의 원서를 주문했다. 며칠 밤을 새가며 원서를 독해하고 책에 나온 칵테일을 바텐더와 함께 만들어 마셨다. 책으론 부족했다. 김씨는 사회부 수습 기자처럼 ‘저인망식 취재’에 뛰어들었다. 20대 여성 직원들을 점심시간에 모아놓고 요새 자주 가는 바의 상호와 위치를 써내라고 했다. 투숙한 손님에게도 조용히 자주 가는 바를 물었다. 며칠이 지나자 리스트가 완성됐다.
한 손에는 리스트를 들고 김씨와 그의 동료는 각각 압구정동과 청담동 들머리에 들어섰다. 김씨는 저녁 6시부터 리스트의 술집은 물론, 눈에 보이는 모든 바마다 들어갔다. 6시부터 새벽 1시까지 술집마다 30분∼1시간씩 머무르며 칵테일을 시키고 안주를 맛봤다. 새벽 1시쯤 되면 한두 잔 마신 술에 불콰하게 취했다. 김씨는 “당시 많게는 하루 저녁에 일곱 군데의 술집도 가 봤다”고 말했다. 180㎝가 훌쩍 넘는 키와 말끔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발 냄새 나는 취재’를 한 셈이다.
웨스틴조선호텔 식음기획팀 과장 김윤정씨는 ‘푸아그라 출장’의 고통에 시달린다. 푸아그라란 거위나 오리 간인데, 프랑스인들이 최고급 요리로 친다. 프랑스에서는 푸아그라를 다량으로 얻기 위해 거위 사육장에서 거위를 묶어 놓고 고무호스를 목구멍에 집어넣은 뒤 사료를 먹인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하면 단시간에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웨스틴조선호텔이 운영하는 뉴욕식 레스토랑 ‘그래머시 키친’은 김씨의 ‘푸아그라’다. 뉴욕을 벤치마킹하고자 김씨는 2005년 뉴욕 출장 때 하루에 여섯 끼까지 먹어야 했다. 웨스틴조선호텔 식음팀은 내부적으로 해외 출장을 ‘푸아그라 출장’이라고 한다. ‘다니엘’이나 ‘장 조지’ 등 뉴욕의 최고급 레스토랑을 모두 들르기에 7박8일은 짧았다. 일분일초를 아끼려면 작전을 짜야 했다.
‘사진 취재’하다 질질 끌려 나오기도
한 레스토랑에서 아침 식사를 한 뒤 점심 땐 다른 레스토랑을 갔다. 저녁 땐 또다른 레스토랑을 갔다. 그 다음날은 아침, 점심, 저녁 식사 순서를 바꿔 전날 갔던 레스토랑을 다시 찾았다. 김씨는 “한 레스토랑에서 아침·점심·저녁 식사를 모두 했다고 쳐요. 당장 ‘저 사람들 뭐 하는 사람들인가’라고 하겠죠”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러나 그는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닷새 동안 세 끼에서 여섯 끼를 먹었다. 물론 ‘풀코스 요리’만 계산한 숫자다. 중간 중간 카페에 들러 샌드위치를 먹어 봐야 했다. 출장 3일째부터 김씨는 화장실에 가서 토하고 난 뒤 다시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
포만감을 피하려고 모두가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자기가 시킨 메뉴는 자기가 비우는 게 출장의 불문율이었다. 모두 양이 적거나 산뜻한 음식을 먼저 시키려고 발버둥쳤다. 당시 한 주방장은 ‘미트볼’이라는 메뉴를 보고 한국의 작은 미트볼을 생각해 희희낙락하며 주문했다 낭패를 봤다. 주먹만 한 크기의 거대한 미트볼 두 개가 접시에 담겨 왔다. 김씨 등 동료들은 킥킥거리는 웃음을 참느라 허벅지를 꼬집어야 했다. 유기농 식품을 판매하는 한 마트에서는 ‘사진 취재’를 하다 채 두 장도 못 찍고 거대한 흑인 경호원에게 쫓겨나다시피 했다. 한국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뒤 다시 입학한 스위스의 호텔학교에서도 ‘음식 취재’를 가르쳐주진 않았다.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식음 아르엔디(R&D)팀은 웨스틴조선호텔에서 ‘푸아그라 출장’이라고 하는 것을 ‘사우디 왕자 출장’이라고 한다. 좀더 고상하게 들리지만 뜻은 같다. 해외 출장을 가면 세계 최고의 갑부인 사우디아라비아 왕자보다 더 좋은 레스토랑에서 먹지만 하루에 대여섯 끼를 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식음 아르엔디팀 김종희씨의 지난달 파리 출장 일과다. 아침 6시 기상 → 한국에서 두 달 전에 예약한 레스토랑에서 풀코스로 아침 식사 → 카페 두 곳에 들러 샌드위치를 먹고 차를 마시며 최신 유행을 체크한다 → 풀코스 점심 식사 → 다시 한두 군데 카페에 들른다 → 풀코스 저녁 식사 → 밤 10시∼11시 바에서 술과 안주를 마시고 먹어 보며 유행을 체크한다 → 새벽 1∼2시에 잠든다 → 다시 아침 6시 기상. 김종희씨는 “‘음식이 목까지 걸렸다’는 게 농담이 아니다. 구토는 안 해봤지만, 음식이 목에서 느글거려서 맥주를 마시지 않으면 잠들지 못한다”고 말했다.
최단 시간 최대 방문… 예약도 쉽지 않네
먹는 것만큼 레스토랑 예약도 어려웠다. 벤치마킹할 레스토랑은 대부분 <미슐랭 가이드>에 소개된 유명한 곳이라 한두 달 전에 전화로 예약해야 했다. 지난달 김씨는 프랑스 한 레스토랑에 예약을 하러 국제전화를 걸었다. 보통 숙소를 정해 놓고 예약전화를 하지만 당시 숙소를 구하기 어려워 레스토랑 예약을 먼저 해야 했다. 프랑스인 지배인은 김씨의 인적사항을 물었다. 김씨가 “서울 코리아”라고 답했다. 흠칫 놀란 웨이터는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사전에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조건으로 예약을 받아줬다. 일분일초를 아껴 레스토랑을 ‘취재’해야 하는 김씨에게 가장 훌륭한 해외 출장의 벗은 ‘구글’이었다. 김씨는 “지난달 출장 열흘 전에 파리 지도를 뽑아 벽에 붙여 놓고 최단 시간에 최대한 많은 레스토랑을 방문하기 위해 동선을 짰다. 물론 그 전에 레스토랑 예약을 다 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시인 유하는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이라고 썼지만, 한 문장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그 문장은 “의심하되 자신의 꿈을 좇으라”쯤 될 터이다. 그들은 단지 화려해 보이기 때문에 호텔리어가 된 게 아니었다. 그들 모두 몸으로 ‘취재’하는 장인들이었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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