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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열혈독자 이정향씨 “남들도 진가 발견할 때 너무 기뻐”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그림책 열혈독자 이정향씨 “남들도 진가 발견할 때 너무 기뻐”
“이렇게 아이가 쳐다보고, 이렇게 지나갔는데, 거리에는 계속 비가 오죠, 그러다가 땅바닥에 고인 물에 그림자가 비치는 데, 갑자기 노숙자가 돌아온 아이를 보는 걸로 시선이 바뀌어요. 꼭 나에게 다가와서 우산을 씌워주는 것 같은 느낌이죠.” 경기도 화성에 사는 주부 이정향씨(37)씨는 김재홍 작가가 그린 〈영이의 비닐우산〉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가끔씩 ‘아~‘하는 감탄사를 터뜨린다.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씨의 그림책 감상을 보노라면 확실히 그림책은 소설이나 다른 책과는 전혀 다른 독법으로 읽는 매체임을 알게 된다.
올해로 초등학교 6학년, 3학년이 되는 딸과 아들을 둔 이씨는 자타공인 그림책 열혈 독자다. 수순은 평범했다.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다가 아이들보다 더 그림책에 빠진 어른이다. 둘째 아이마저 또래 친구들처럼 이제 그림책보다 글씨 많은 동화책을 더 찾게 됐지만 지금도 좋은 그림책이 나오면 안 사고는 못 배긴다. 소파도 티브이도 없는 집 거실의 한쪽 벽은 동화나 과학·역사책으로, 다른 한 벽은 그림책으로 빼곡하게 꽂혀 있다. 그림책만 어림잡아 1천권이 넘는다.
전산 관련 일을 하면서 책에 별다른 관심도 흥미도 없던 첫아이 때만 해도 남들처럼 아이에게 방문판매하는 전집 그림책을 사주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가 사준 전집 목록에는 지금까지도 후회가 가시지 않는 ‘명작 애니메이션’류 따위가 있었다. 둘째를 낳고 직장을 그만두면서 그림책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둘째가 갓난쟁이일 때 큰아이를 데리고 느티나무 도서관을 다녔어요. 그러면서 그림책에 대한 흥미가 생기고 좀 제대로 읽어줘야겠다는 마음에서 동화읽는어른모임에 가입하게 됐죠“ 이정향씨는 동화읽는어른모임 수원지회의 그림책 분과에서 3년 동안 활동했다. 지난해에는 집이 멀어 도서관 이용이 불편한 둘째 아이의 반 아이들을 위해 일주일에 한 시간씩 그림책을 읽어줬다. “그림책은 누군가 읽어주는 게 중요해요. 모임에서도 회원들끼리 서로 읽어주면서 그림책 감상하는 법을 배우게 됐죠.”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주만지>, <폴라 익스프레스> 등 영화화된 그림책으로도 유명한 크리스 반 알스버그. 또 닐 게이먼의 <금붕어 2마리와 아빠를 바꾼 날>처럼 아이의 눈높이에서 어른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그림책을 좋아한다. “제가 어릴 때 봤던 책은 무조건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는데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림과 글의 상상력 모두 상투성이나 정해진 틀을 뛰어넘는 게 좋은 그림책의 특징인 것 같아요.” 사계절출판사의 <도착>은 근래 만난 그림책 중 최고작이었다고. 그림책의 구석구석을 뜯어보다 보니 원작과 번역서의 질감 차이도 알게 되면서 사 모은 원서만도 120권이 넘는다. 이씨는 남편과 남동생, 동료 학부모 등 오래전 그림책을 졸업했던 사람들이 자신의 권유로 그림책의 진가를 재발견할 때 본인의 일처럼 기쁘다고 한다.
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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