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라노 컬렉션의 정글에서 ‘팔색조 얼굴’을 각인시킨 모델 김영광
[매거진 Esc] 도대체 누구야?
밀라노 컬렉션의 정글에서 ‘팔색조 얼굴’을 각인시킨 모델 김영광
김영광. 축구선수가 먼저 떠오르는 사람도 많겠지만 지금 말하려는 건 올해 스물한 살의 모델 김영광이다. 187㎝의 키에 줄자를 대보고 싶을 만큼 기나긴 팔다리와 공상에 빠진 10대 소년처럼 순진한 얼굴을 가진 이 모델은 지난 1월 ‘큰 사고’를 쳤다. 세계 3대 컬렉션의 하나인 밀라노 컬렉션 무대에 섰다. 혜박, 한혜진 등 여성 모델의 세계적 활약이 전개된 지는 제법 됐지만 남성 모델의 본격적 활동은 그가 처음이다. 에트로와 알렉산더 맥퀸,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쇼에 올랐다. 영 킴(Yung Kim)은 밀라노와 파리에서 유수의 디자이너들에게 그가 각인시킨 이름. 한국 패션계는 김영광을 통해 세계 무대에 파란 불 하나를 더 켰다.
뉴욕 컬렉션 에이전시에서도 러브콜
“한국 무대와 다른 점이요? 음, 한국에서는 리허설 때 도시락을 하나씩 주는데 거기는 무대 뒤에 바가 설치돼 있어서 먹을 것도 많고, 옷도 선물해주고. 음, 모델을 좀더 대접해주는 거 같아요.” 느리고 앳된 말투다. 게다가 얼굴엔 부끄럼을 머금은 소년의 웃음이 늘 고여 있다. 한국에서 패션쇼 리허설을 할 때 자주 들었던 지적이 “웃지 마”였을 만큼 맘 편하고, 경쟁이라면 가위바위보 놀이조차 귀찮아할 것 같은 이 ‘소년’이 치열한, 아시아인에게는 특히나 더 험난한 모델 세계의 정글에서 자신을 각인시켰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아침부터 오디션장 가서 줄 서서 기다렸다가 담당자를 만났는데 포트폴리오를 넘기면서 계속 옆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눈은 당연히 옆사람한테 가 있고. 그러다가 다 넘기고 나면 ‘땡큐’ 그러고 끝이에요. 대형 에이전시에서도 아시아계 남자 모델은 자신들이 보유한 한 명 정도면 충분하다고 하더라구요.” 지난해 봄 에트로 무대에 잠깐 섰던 그를 눈여겨봤던 남성지 <지큐>(G.Q) 이탈리아판 편집장의 적극적 추천이 한몫했다. 한국보다 더 재미있고 신나는 경험이었지만 다녀와보니 몸무게가 5㎏ 가까이 쪽 빠졌다.
한참 옷차림에 예민한 사춘기 때도 엄마가 시장에서 사다주는 옷을 불만 없이 입고, 브랜드라야 캘빈 클라인이 최고인 줄만 알았던 김영광이 모델의 길에 들어선 건 우연한 기회였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빈둥거릴 때 아는 형이 아르바이트를 소개했어요. 광고에 뒤통수가 나오는 건데 이틀 일하면 백만원 준다는 말에 혹했죠.” 광고 촬영현장에서 지금의 매니저를 만나 모델 제안을 받았다. 처음엔 시큰둥했다. 엄마는 괜한 겉멋만 든다고 결사반대했다. 딱히 할 일도 없어 “얼떨결에 시작” 한 것이 무서운 기세로 상승세를 탔다. 쇼를 했던 패션 디자이너 정욱준, 장광효 등이 그의 성공을 일찌감치 점쳤다. 그의 화보를 촬영했던 한 사진작가는 “찍을 맛이 나는 모델”이라고 평했다. 외국 톱 모델에 비해도 밀리지 않는 신체 비율뿐 아니라 각을 바꿀 때마다 다양한 표정이 나오는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인터뷰 촬영 때 사진기자의 요구에 “네”라고 공손히 대답하는 말투와 달리 그의 얼굴은 개구진 소년에서 선 굵은 ‘남자’까지 팔색조처럼 바뀐다.
“쇼에 처음 섰을 때는 런웨이가 너무 길게 느껴져서 중간에 주저앉고 싶었”는데 런웨이가 끝나고 나니까 비로소 ‘이 일이 재미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모델로서 더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밀라노 가면 먹힐 외모야”라는 주변의 말에 매니저와 농반 진반으로 “그럼 우리 한번 해볼까” 하다가 진짜 해버렸다. 밀라노가 끝나고 파리 컬렉션에서도 한 무대에 섰고, 귀국할 때쯤 뉴욕 컬렉션 에이전시의 러브콜을 받았다.
클럽 가는 것보다 산이 더 좋아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델들의 세계는 자유롭고 화려하다. 파티, 클럽, 디제잉 등의 단어들이 모델과 자주 한 묶음으로 언급된다. 그런데 톱모델 김영광은 “클럽 가는 거 싫어하고 친구들하고 가끔 산에 가는 게 좋은” 청년이다. 연기 수업을 받는 요새는 집에 있을 때 책을 읽는다. 지금 읽는 책은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안톤 체호프의 <벚꽃 동산>. 원래 책 읽는 것을 좋아했던 건 아닌데 “진짜로 있어 보이는 모델이 되려면 속에 뭔가 있어야 그게 밖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는 게 그가 책을 읽는 이유다. 지난해 봄 처음 밀라노에 다녀온 뒤부터는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다. “모델들끼리 막 수다 떠는데 끼지 못해서 속 상했는데, 다음번에는 미소로만 친해진 외국 모델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연락처도 받아 올 계획”이라고 한다.
모델로서 꿈은 “아시아인이라는 콤플렉스가 아시아인으로서 유니크함, 그리고 나만 보여줄 수 있는 유니크함으로 인정받는 무대에 서는 것”이다. 연기를 해보자는 제의가 꾸준히 들어오지만 모델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다음, 연기 준비가 제대로 된 다음으로 미루고 싶다. 하지만 그가 나이 들어서 정말정말 하고 싶은 것. “모델로 돈을 많이 벌어서 큰 집을 사가지고 강아지들 키우면서 살고 싶어요. 내가 좋아하는 그림도 그리면서요. 일요? 그냥 그렇게 놀면서 살고 싶은데요.(웃음)”
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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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말 열린 2008 F/W 밀라노 컬렉션 에트로 쇼 무대에 오른 김영광. 초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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