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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어디서도 상담받기 힘든 세 가지의 사연에 답함
[매거진 Esc]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개나 남자나 그게 그거걸랑
오늘은 그동안 보편성 미달로 기각된 사연 중, 딱히 어디서 상담받기 힘든 케이스 몇 골라, 사해동포주의에 입각, 간단간단 답변 좀 달고 넘어가자.
A 제 여친은 애완견을 넷이나 키우는데요. 데이트 코스는 주로 애견카페나 강아지 산책이고, 둘이 식사를 해도 음식 싸서 강아지들한테 갖다 줄 생각부터 합니다. 분위기 잡고 스킨십이라도 할라치면 개들이 달려들어 흥을 깨버립니다만, 그녀는 개들 껴안고 즐거워 죽습니다. 제가 실망했단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상대가 강아지다 보니 뭐라 하기도 그렇고 그냥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죠. 연애 5개월간 제대로 키스 한번 못한 저로선 이게 대체 무슨 연애인지 황당하기만 합니다. 친구들한테 말해봐야 개를 질투한다고 비웃기만 하니 어쩌면 좋습니까.
1. 자자, 그만 비통해하고, 차근차근 짚어보자. 우선, 개 따위가 연적일 수 있냐, 물론이다. 상대 관심의 배타적 점유, 연인의 기본 욕망이자 권리다. 연인이라면 마땅히 요구할 관심의 절대량, 있는 법. 그런데 그 귀중한 자원의 대부분이 그 개들에 의해 소진되고 있다. 열, 받지. 게다가 그녀, 그 사실 인지 못하고 있다. 낭패다. 당신이 항의하면 동물 사랑이 죄냐 항변할 게야. 물론 그 자체가 죄일 순 없지. 다만 그게 연인에 대한 무례에 면죄부가 될 순 없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건, 연인으로서, 큰, 폭력이다.
2. 개 따위가 연적이란 자괴와 심지어는 뒤지고 있단 분노가 좀더 숙성하면, 그녀 몰래 그 개새끼들 대구리, 틈만 나면 걷어찰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문젠 그런다고 변하는 건 하나도 없단 거. 어쩜 좋냐. 그녀, 깨닫게 할 방도, 없느냐. 개랑 노느라 키스도 않는다면, 이기적인 사바세계가 초래하는 불안과 결핍을, 배신할 줄 모르는 동물과의 교감을 통해 해소하는 게 더 편해진 처자겠다. 그리 최적화된 그녀 정서 장치를 리셋하기란, 대단히, 지난한 일. 일단 당신도 개 한 마리 길러보시라. 그녀가 자신에게 할당되어 마땅하다 믿는 분량의 관심을, 그녀 앞에서, 그 개에게 고스란히, 반복해, 투입해 보시라. 개한테 당하고 개로 복수라, 졸라 유치하지 않냐, 뭐 유치할 것도 없다. 개나 남자나, 여자 앞에선 그게 그거잖아. 그래도 안된다, 그럼, 웬만해선, 안 된다. 그녀 다섯 번째 강아지라도 기껍기만 하오, 정도 아니라면, 더 비참해지기 전에 헤어지시리라. 좀더 지나면 당신, 개 문다.
B 제 여친은 다 좋은 데 먹는 걸 지나치게 좋아합니다. 남들은 그게 무슨 고민이냐 핀잔이지만 제가 같이 먹지 않으면 그녀가 삐진다는 겁니다. 저녁 먹고도 눈에 띄는 길거리 포장마차마다 일일이 방문하는 그녀는 제가 정말 배부르다고 혼자 먹으라 말하면 그걸 그렇게 섭섭해합니다. 꼭 손잡고 먹어야 해요. 매일 밤 헤어질 때가 되면 토할 지경입니다. 배가 불러 숙면도 못 취하고요. 오죽하면 제가 여기 메일을 다 보냈겠습니까. 이거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1. 씨바, 연애 해먹기, 참 힘들다. 그녀는 그렇게 남친과 함께 야식 순례 한단 자체가 제 나름의 낭만이고 애정표현인가 본데, 그럼 뭐 별 도리 없다. 연애 지속하는 한, 감당해야지. 그 코스 절반 이하로 줄이지 않으면 이별하리, 협박한다 치자. 그건 또 얼마나 웃긴 결별인가. 다행히 위는 상당히 신축적인 기관인지라 상당한 정도로 확장, 가능하다. 꾸준히 늘여주다 보면 어느 순간 그녀 위와 보조 맞춰지겠지 뭐. 내가 봐도 웃긴 답변이다만 어쩌랴, 애초 연애란 게, 미쳐서 하는 수작인걸.
C 20댄데 벌써 이마가 벗겨졌습니다. 대학생 때부터 교수님이라고 놀림받았고 그때마다 웃어넘겼지만 속으론 상처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대학 내내 소개팅 한 번 안 하다 취직 후 처음 나간 지난 주 소개팅에서 상대가 딱 30분 만에 일어서더군요. 충격이 큽니다. 여자들은 대머리를 그렇게 싫어하나요.
1. 실토부터 하자. 대머리, 호감 요인, 아니다. 근데 카이사르도 대머리였다만 당대의 카사노바였단 말이지. 대머리가 연애의 결정적 결격사유냐, 것도 아니란 거지. 문제 본질은 모발의 결여가 아니라, 그로 인한 자존감의 결여. 본능적으로 가장 우성의 유전자를 판독해 내는 여자들이 기가 막히게 구분해 내는 건, 머리털 개수가 기장이 아니라, 바로 그거라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고스란히 인정하고 스스로를 농담거리로 만들어 버릴 만큼 견고하고 대범한 자기인식은, 그 자체로, 졸라 섹시하거든. 그러니까 당신을 진정 안 섹시하게 만드는 범인은 모발이 아니라, 그로 인해 스스로를 하나도 안 섹시하다 여기며 스스로 주눅 드는, 당신의 자기 인식. 오케이?
PS - 참, 다들, 고생한다. 허나, 당신만 그 고생인 건, 결코 아니라는 거. 힘들 내자. 으랏차차.
김어준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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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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