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가 정범태
[매거진 Esc] 한국의 사진가들 첫회
사진에는 사진가의 삶과 철학이 반영된다. 당신이 찍는 사진에도 당신의 모습이 투영된다. 한국의 대표적인 사진가들을 만나 그들의 삶과 사진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이들이 건진 이미지는 당신이 사진을 대한 태도의 좋은 거울이 될 것이다. 는 이번 주부터 한국 사진의 거장, 신예와 중진을 만나 격주로 연재한다.
1950년대 후반 혜성처럼 나타났던 정범태,
팔순의 노구에도 명인·명창을 쫓다 1961년이었다.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난 뒤, 경기고등군법재판소에서 군사재판이 있었다. 사회 기강을 잡는다며 일제히 사람들을 잡아들인 뒤 치른 어처구니없는 재판이었다. 다른 사진기자들은 이미 촬영을 마치고 뒤에 서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때 방청석에 있던 꼬마가 재판정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피고인 엄마 앞으로 다가가 손을 잡았다. 바로 그때 판사는 ‘마약범’으로 잡혀 온 그 엄마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동시에 한 사진기자의 카메라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1960년 4월, 와이셔츠를 스친 총탄
이튿날 <조선일보> 사회면에 명함 크기로 조그맣게 실린 사진 <결정적 순간>은 이후 한국 사진가 ‘정범태’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 사진은 그해 아사히신문이 주최하는 국제사진살롱 공모전에서 ‘10걸’로 뽑혔고, 일본 굴지의 출판사 헤이본사가 67년 발행한 <세계사진연감-10주년 특집; 1956년 10월~1966년 9월>의 37장의 세계 보도사진에 선정됐다. 프랑스의 세계적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작품도 정범태의 사진과 함께 실렸다.
이채롭게도 사진 제목 <결정적 순간>은 브레송의 사진 이념이다. 셔터를 누르는 ‘결정적 순간’에 사건의 본질이 드러나는 동시에 예술로서의 조형적 완성이 달성돼야 한다는 것. 정범태(79)씨는 ‘맹수가 먹이를 채 가듯’ 결정적 순간을 동물적 본능으로 잡아챌 줄 아는 사진가였다.
“사진기자를 하면서 나는 두 대의 카메라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일단 신문사에 제출할 사진을 찍고 나면, 개인용 카메라인 라이카 3에프(F)로 내 사진을 찍었지요.”
비평가들은 50년대부터 60년대 초반까지의 그의 사진을 최고로 친다. 이 시대 정범태 사진의 두 세계-예술사진과 신문사진-는 각각 최고에 이르렀다. <말과 마부> 연작, 4·19 하루 전 총탄에 쓰러진 고려대생들을 담은 특종 사진 등은 충격적이면서 아름답다.
“그 시대는 죽고 사는 문제로 뒤덮여 있었어요. 전쟁과 평화, 삶과 죽음은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작품에선 삶과 죽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꿈틀거린다.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생명성과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 그리고 유난히 동물이 많다. 그리고 적나라하다. 깃털이 벗겨진 채 매달린 닭의 사체 옆에 서 있는 닭, 고사상에 오른 돼지의 사체 등.
정범태 사진가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1960년 4월20일 서울 도심 시위 현장에서 경찰의 총은 그의 취재차량을 겨눴다. 다행히 총탄은 그의 와이셔츠를 스쳐 지나갔지만, 수송부 직원의 배를 뚫고 지나갔고 그는 숨졌다. 1962년에는 강화도 전등사에 놀러 온 상춘객이 깡패들의 행패에 쫓겨나는 장면을 포착한 특종 사진을 실었다가 ‘적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고무·찬양했다’는 혐의로 경기고등군법회의에 끌려가 1년 동안 수형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는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90년대까지 그의 직업은 사진기자였다. 그의 사진 중에는 자신을 감옥에 보낸 박정희 정권의 퍼스트레이디 육영수씨와 아들 박지만씨의 사진도 있다. “사진의 역할은 기록입니다. 누가 됐든 그저 찍을 뿐입니다. 감옥에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새 기술 익혀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그에게는 사진예술가의 카리스마보다는 담담한 생활인의 모습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의 사진은 어쩌면 그의 모습과도 닮았다. 사진이 밥벌이가 된 일상에서 결정적 순간을 성실하게 기다려 잡아낸 장면들.
그는 지금도 사진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물론 지금 그의 사진은 그가 혜성처럼 나타난 1950년대 후반처럼, 삶의 핍진성이 드러난 한국 근대사의 적나라한 세계가 아니다. 60년 넘게 찍고 있는 명인·명창 소리꾼들이 그가 착목한 주제다. 그의 나이와 맞먹는 일흔, 여든의 ‘피사체들’은 하나둘 세상을 등지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새 기술을 익혀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다.
글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정범태 사진의 하이라이트를 보려면
<정범태 사진집-카메라와 함께한 반세기>(눈빛 펴냄)를 펼 것. 1950~60년대의 리얼리즘 대표작을 중심으로 1990년대의 사진까지 180여장이 실려 있다. 열화당 사진문고 <정범태>(박정진 지음·열화당 펴냄)도 그의 작품 세계를 총괄할 수 있는 책이다. <한국 춤 100년>(눈빛 펴냄) 시리즈는 지난해 1권이 나온 이래 앞으로도 계속 출판될 예정이다.
이밖에도 정범태가 쓰고 찍은 <경서도 명인명창>(깊은샘 펴냄)과 구희서가 쓰고 정범태가 찍은 <김덕명: 양산사찰학춤>, <춘앵전: 김천응>등이 있다.
1950년대 후반 혜성처럼 나타났던 정범태,
팔순의 노구에도 명인·명창을 쫓다 1961년이었다.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난 뒤, 경기고등군법재판소에서 군사재판이 있었다. 사회 기강을 잡는다며 일제히 사람들을 잡아들인 뒤 치른 어처구니없는 재판이었다. 다른 사진기자들은 이미 촬영을 마치고 뒤에 서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때 방청석에 있던 꼬마가 재판정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피고인 엄마 앞으로 다가가 손을 잡았다. 바로 그때 판사는 ‘마약범’으로 잡혀 온 그 엄마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동시에 한 사진기자의 카메라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1960년 4월, 와이셔츠를 스친 총탄

1961년 <조선일보>에 실린 사진 <결정적 순간>. 사진가 정범태의 이름을 세계에 알렸다.

1956년 서울 염천교 근처 길바닥에 누운 한 소년. 그 해 정범태 사진가는 사진 모임 '신선회'에서 리얼리즘 사진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정범태 사진의 하이라이트를 보려면
<정범태 사진집-카메라와 함께한 반세기>(눈빛 펴냄)를 펼 것. 1950~60년대의 리얼리즘 대표작을 중심으로 1990년대의 사진까지 180여장이 실려 있다. 열화당 사진문고 <정범태>(박정진 지음·열화당 펴냄)도 그의 작품 세계를 총괄할 수 있는 책이다. <한국 춤 100년>(눈빛 펴냄) 시리즈는 지난해 1권이 나온 이래 앞으로도 계속 출판될 예정이다.
이밖에도 정범태가 쓰고 찍은 <경서도 명인명창>(깊은샘 펴냄)과 구희서가 쓰고 정범태가 찍은 <김덕명: 양산사찰학춤>, <춘앵전: 김천응>등이 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