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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낭패의 연속입니다.
출국심사대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립니다. 여권을 빠뜨렸습니다. 집에 두고 왔습니다. 비행기 시간이 30분도 안 남았습니다. 핸드폰으로 사방에 연락합니다. 아무도 전화를 안 받습니다. 발만 동동 구릅니다. 그러다가 간신히 기내에 들어갑니다. 한데 이게 뭡니까. 가장 중요한 카메라를 놓고 왔습니다. 플래시도 없습니다. 아니 여행가방까지 통째로 사라졌습니다. 어쩝니까. 식은땀이 흐릅니다.
가끔 그런 꿈을 꿉니다. 시험 치는 꿈과 비슷합니다. 종 치려면 5분밖에 안 남았는데, 한 문제도 못 풀고 끙끙대다 깨어나는…. 언제부터인지 공항이 개꿈의 무대로 자주 등장합니다.
외국엘 열 번 넘게 나갔지만, 개인여행은 별로 없었습니다. 대부분 업무와 관계된 출장이었습니다. 떠나기 전날 밤엔 잔뜩 긴장하고 준비물을 챙깁니다. 공항 출국장에 들어서면 신경이 곤두섭니다. 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면세점을 어슬렁거리며 작은 선물 따위를 챙기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참 각박했습니다.
얼마 전 집에서 꼬마아이가 졸랐습니다. “아빠, 인천공항에 놀러 가자.” 비행기를 구경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는 냉소적으로 답했습니다. “촌스럽게시리….” 불현듯 10개월 전 방콕 수완나품 공항 주변 국도의 ‘시골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인근 주민들이 길가에 늘어서 비행기 뜨고 내리는 걸 쳐다보는 모습이었습니다. “할 일들 참 없다”고 한심해했던 것 같습니다.
아이가 아니라, 어른도 공항에 놀러 갈 수 있습니다. 이번호 커버스토리를 읽으며, 그동안 공항에 너무 무지했다는 걸 실감합니다. 진짜 촌스러운 건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저였습니다. 공항에 놀러 가고 싶어집니다. 이왕이면 비행티켓을 들고 말입니다.
고경태/<한겨레> 매거진팀장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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