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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피지기’ 건너뛴 채 위태로웠던 3년 [ESC]

등록 2023-10-28 08:00수정 2023-11-08 11:23

오늘하루운동 주짓수

손자의 정보전, 노자의 총명함
고전의 가르침 뒤늦게 깨달아
고수들, 은밀·미묘하게 실행
양민영 작가(왼쪽)가 상대의 팔을 꺾는 공격 기술인 암바를 시도하고 있다. 박종혁 제공
양민영 작가(왼쪽)가 상대의 팔을 꺾는 공격 기술인 암바를 시도하고 있다. 박종혁 제공

주짓떼로(주짓수를 수련하는 남성)들은 격언을 좋아한다. 유명 선수나 주짓수 지도자의 격언이 그들 사이에서 복음처럼 전해진다.

내가 섬기는 싸움의 모토는 하나뿐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지피지기 백전불태) 흔해빠진 클레셰라고? 클리셰가 아니라 고전이다. 나는 클래식을 좋아한다.

이 문장은 춘추전국시대의 전략가인 손자가 ‘손자병법’에 기록했다. 그러나 이 유명한 전술은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많이 회자되면서 평가절하됐다. 많은 사람이 이 문장을 ‘지피지기 백전백승’, 혹은 ‘지피지기 백전불패’로 잘못 알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주짓수 주창자, ‘효율적 격투’ 연구

‘손자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의 전략이라고 설파하는 전쟁론의 고전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이라니. 마치 ‘식사량을 조절하지 않아도 살이 빠지는 기적의 다이어트 약’ 따위의 허위광고 같다. 그러나 숨 쉬듯 경쟁해야 하는 현대인에게 솔깃한 카피가 아닐 수 없다. 싸우는 게 취미인 주짓수 수련자에겐 더더욱.

전설의 전략가가 말하는 이기는 비결의 으뜸은 ‘이기지 못할 상대와 싸우지 말라’이다. 이 무슨 시시한 소리냐고? 진정하라, 손자가 써놓은 대로 옮겼을 뿐이다. 손자는 병법서를 남겼다는 이유로 전쟁을 좋아하고 이기는 데 집착하는 전쟁광이라고 오해받지만 도리어 그는 전쟁에 있어서 ‘신중’을 강조했다. 승산 없는 싸움을 피하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알고 보면 손자는 전쟁을 득보다 실이 많은 행위로 보는 철저한 실리주의자다. 심지어 너무 참혹한 전쟁은 이겨도 진 것과 다름없다고 했다. 이는 브라질 주짓수의 주창자 엘리우 그레이시의 철학과 일맥상통한다. 손자와 그레이시는 둘 다 경제성을 중요시했다. 손자가 말하길 전쟁은 그 자체로 고비용이다. 그레이시 또한 격투가로서는 드물게 싸움의 비용을 계산했다. 무도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너는 주짓수를 할 수 없겠다”고 선고받았을 정도로 체구가 작았다. 치명적인 약점으로 인해 그는 힘을 낭비하지 않으면서 상대를 지치게 하는, 극도의 효율적인 기술을 연구했다.

손자가 강조한 ‘지피지기 백전불태’는 한마디로 말하면 정보전에서 승리하라는 뜻이다.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를 완전히 이해하는 게 전제 조건이 되어야 한다. 13장으로 이뤄진 ‘손자병법’을 진지하게 읽기 시작한 부분은 ‘지피지기 백전불태’가 등장하는 3장부터였다. 솔직히 말하면 이 책엔 과시하길 좋아하는, 중년 이상의 남자들이 열광할 말장난이 태반일 거라고 넘겨짚었다.

그러나 손자가 ‘적을 알고 나를 안다’는 개념을 뒤집어서 ‘적을 모르고 나도 모르면서 전쟁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한 대목에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게 바로 내 이야기였다. 나는 적을 모를 뿐만 아니라 적에게 관심조차 없었다.

상대의 움직임은 보지 않고 내가 어떻게 움직일지 생각하기에 바빴다. 자연히 상대에 관해서 아는 바가 없다. 특기가 무엇이고 어떤 패턴으로 공격하고 방어하며 어떤 포지션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나를 빠삭하게 아는 것도 아니어서 결국 아는 게 없는, 일종의 무지 상태로 자그마치 3년 이상을 피상적으로 싸웠던 거다.

6장 ‘허실’(충실한 부분은 피하고 허약한 부분을 공격하라)에 이르면 ‘손자병법’은 단순한 전쟁론이 아닌 문학으로 느껴진다. 동서양의 수많은 격투가가 이 책을 ‘인간 본성을 파헤친 걸작’이라고 칭송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전쟁은 곧 심리전’이라는 ‘손자병법’의 주제와 핵심적인 실천 이론이 ‘허실’ 장에 압축돼 있다. 가장 인상적인 구절도 여기서 찾았다. “공격을 잘하는 자는 수비하는 곳을 적이 알지 못하게 하고, 수비를 잘하는 자는 공격해야 할 곳을 적이 알지 못하게 한다. 미묘하고 미묘하니 형태가 없고 신기하고 신기하니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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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링에서 당하기만 했던 이유

양민영 작가(앞쪽)가 상대가 뒤에서 공격하는 백마운트 포지션에서 벗어나는 이스케이프 기술을 시도하고 있다. 박종혁 제공
양민영 작가(앞쪽)가 상대가 뒤에서 공격하는 백마운트 포지션에서 벗어나는 이스케이프 기술을 시도하고 있다. 박종혁 제공

손자뿐 아니라 노자의 가르침도 있다. 적을 상대로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전략은 ‘보이지 않는 총명함’인데,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를 일컬어 ‘미명’(은밀한 밝음)이라고 했다. 미명이 최고 경지의 전술인 이유는, 모든 사물에는 두 가지의 대립적인 속성이 있고 반드시 두가지가 번갈아 나타나기 때문이다. 먼저 약하면 나중에 강하고, 먼저 빼앗으면 나중에 빼앗긴다. 그러므로 이를 이용해서 먼저 빼앗고 싶으면 반대로 먼저 주는, 보이지 않는 총명함을 발휘해야 한다.

주짓수도 미명의 원리대로 모든 게 거꾸로다. 공격의 기회를 잡고 싶으면 상대가 먼저 공격하게끔 공격의 기회를 준다. 이는 단순 속임수라고 규정하기엔 심오하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적을 유린해서 나에게 유리한 국면을 만들어야 하고 그러자면 적의 예상을 깨는 의외의 발상이 필요하다. 이는 얄팍한 속임수가 아니라 상대의 예상을 몇수씩 내다보는 은밀한 밝음이다. 어떻게 싸움을 주도할지 알려주는 비밀스러운 빛은 나에게만 보이고 적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

이제 겨우 블루 벨트인 내가 완성 단계에 이른 블랙 벨트와 겨뤄본 경험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일방적으로 유린만 당하다가 끝났던 짧은 스파링에서 받은 인상은 그들이 하나같이 은밀하고 미묘하다는 거다. 수동적으로 방어만 하는데 어느 순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공격이 들어와 있고, 특별히 움직임이 없는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는 내가 모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 블랙 벨트가 상당한 실력자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 같은 초보는 알 수 없는 블랙 벨트만의 미명이 있는 건 확실하다.

손자는 또 기세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병사를 나무와 돌이 구르는 것처럼 싸우게 하라”고 했다. 주짓수에서 스파링을 뜻하는 ‘롤링’과 동의어로 보인다. 손자의 가르침과 주짓수의 공통점이 너무나 많아 그가 20세기에 태어났다면 주짓수 도장에서 떠날 줄 모르는 붙박이가 되지 않았을지.

양민영 작가

사회적기업 운동친구의 대표이며 ‘운동하는 여자’를 썼다. 페미니즘과 여성의 운동에 관한 콘텐츠를 만들고, 못 하는 일에 도전하기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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