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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 속 펼쳐진 다른 길…공포물 옷 입은 성장영화

등록 2023-09-16 11:00수정 2023-09-16 11:22

[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이노센트

복잡하고 정제되지 않은 ‘동심’
오랫동안 영화 속 공포의 대상
폭력 노출되고 관심 갈구하고
초능력 인지하며 ‘선악 대결’
(주)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주)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아이’들은 오랜 시간 괴물이었다. 공포영화에서 말이다. 예컨대 ‘할로윈’(1978)의 전설적인 호러 아이콘 마이클 마이어스는 ‘성적으로 문란한 누나’를 훔쳐보다 마침내 칼을 휘두르는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이 세계에 데뷔했다. ‘할로윈’은 ‘13일의 금요일’과 함께 1980년대 슬래셔 무비(정체 모를 인물이 연쇄 살인을 저지르는 끔찍한 내용의 영화)의 전성기를 열었고, 이 장르는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미성년자들의 자유분방함을 희생양으로 삼아 번성했다.

그 옆에선 오컬트 장르가 함께 인기를 누렸다. 악마 숭배나 마녀의 ‘비술’(秘術) 같은 초자연적 사건을 다루는 영화에서 여자는 걸핏하면 신의 뜻을 거슬렀고, 아이는 인류 절멸의 씨앗을 품은 채 세상에 태어나거나(‘악마의 씨’) 사탄에 빙의돼 어머니를 탐했으며(‘엑소시스트’), 은밀하게 어른들을 관찰했다(‘오멘’). 그리고 이 ‘맑은 눈의 광인’들은 때로 마음에 들지 않는 어른을 잔인하게 처단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두려워할 게 아니라 이해해야 하는

‘어린이-괴물’의 속마음은 언제나 불가해한 것이었으므로 오로지 마귀 혹은 사이코패스라는 오명으로만 설명됐다. 하지만 지배적인 경향 안에서도 언제나 균열은 존재한다. 공포영화의 거장인 웨스 크레이븐은 ‘나이트메어’(1985)에서 괴물은 아이들이 아니라 그들을 억누르려는 어른들의 도덕적 강박으로부터 태어난다고 말한다. 이 위대한 비평은 ‘스크림’ 시리즈나 ‘케빈 인 더 우즈’(2012) 등으로 변주되었고, 마이크 플래너건의 ‘썸니아’(2016)로 전수됐다.

‘썸니아’의 어린 소년 코디는 제시와 마크 부부에게 입양된다. 그는 과거에 알 수 없는 이유로 파양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훈련된 관객인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를 의심쩍어한다. ‘입양아’야말로 중산층 백인 가정의 골칫덩어리라는 가이드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코디는 문제를 일으킨다. 잠이 들면 그의 꿈이 현실화하는 것이다. 평화로운 꿈을 꿀 땐 괜찮지만 악몽을 꾸기 시작하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코디의 악몽에서 튀어나오는 괴물인 캔커맨은 ‘나이트메어’의 프레디처럼 주위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해친다. 과연 소년의 길들여지지 않은 사악함이, 혹은 부계혈통주의를 해치는 ‘입양아’의 불순함이 캔커맨을 낳은 것일까?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캔커맨’은 코디가 어린 시절 보았던 친엄마의 사망 이유인 암(cancer)에 대한 공포로 빚어진 존재였다. 새롭게 엄마가 된 제시가 코디를 이해했을 때, 비로소 캔커맨은 사라진다.

(주)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주)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어린이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욕망과 불온한 마음이 혼재한다. 어쩌면 그 자체가 성인에게는 두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정제되지 않은 혼란을 잘 간수하는 일이야말로 어른이 되는 법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통제되지 않는 아이들의 활기는 돌이켜서는 안 되는 어린 시절의 자유를 떠오르게 하고, 그것이 때로 ‘멋대로 굴 수 없는 나’를 괴롭힌다. 공포영화는 그런 정서에 기대어 어린이를 타자화하고 소외시키면서 성인 관객들을 매혹해왔다.

하지만 ‘썸니아’처럼 설사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어린이의 세계를 찬찬히 다뤄보자고 말하는 공포영화 역시 존재한다. 에실 복트의 ‘이노센트’는 북유럽 영화의 계보 안에서 이 흐름에 동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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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모르는 ‘마지막 승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언니 안나 때문에 부모로부터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이다는 울분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새로 이사 온 낯선 동네에서 벤자민을 만나게 되고, 벤자민은 그의 작은 비밀로 이다를 즐겁게 해준다. 그 비밀이란 바로 벤자민이 염력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이다는 새 친구의 놀라운 능력에 흥분하지만, 곧 고양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죽여버리는 벤자민의 폭력성에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한편, 안나도 친구를 사귄다. 우울증이 심한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아이샤다. 아이샤는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이의 생각과 마음을 느끼고 당황하는데, 그게 옆 건물로 이사 온 안나의 내면의 소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아이샤는 안나의 입이 되어주고, 그 덕분에 안나의 자폐 증세도 조금씩 호전된다. 그리고 안나가 자신의 마음을 읽는 영매(아이샤)를 만나자,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염력이 깨어난다.

그렇게 네 사람은 어울려 다니게 되는데 이 관계 안에서 벤자민의 염력은 점점 더 강해진다. 문제는 벤자민이 그 염력을 관리하고 사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점이다. 세상에 잔뜩 화가 난 그는 사람들을 해치기 시작하고, 세 아이들은 어떻게든 그를 막고자 한다. 하지만 벤자민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이어지는 참극 속에서 영화는 빛의 염력을 가진 안나와 어둠의 염력을 가진 벤자민 사이의 최후의 대결을 향해 점점 더 고양된다.

‘이노센트’는 공포영화의 외피 아래에서 성장이라는 화두를 다룬다. 처음 만났을 때 서로 닮은꼴이었던 이다와 벤자민은 결핍을 지닌 채로 각자의 방식대로 세계와 부딪히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이 다른 길을 가게 되는 건 선한 의지를 가진 아이샤의 등장 때문이다. 이다는 아이샤 덕분에 언니에게도 감정과 생각이 있다는 걸 배우고, 이를 통해 그는 악의를 다스리고 선의를 행하는 법을 익혀간다. 하지만 벤자민에게는 그런 기회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그의 처지가 더 안 좋기 때문이다.

집 안팎으로 폭력에 시달리는 벤자민은 세상에 대한 답답함과 사랑하는 이들에게서 느끼는 서운함, 인정욕구 등이 복잡하게 얽힌 상태로 무시무시한 힘을 휘두르게 된다. 그에게 초능력은 감정적 탈출구가 되지만 결국은 삶을 옥죄는 굴레가 된다는 점에서 양가적이다.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충동 때문에 소중한 것들을 잃고 고통 속에 절규하는 그의 얼굴은 상실 이상의 좌절을 담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익숙했던 장르 관습을 또 한번 역전시킨다. 언제나 어른의 세계에 짓눌렸던 어린이의 세계가 전면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두 초능력자의 마지막 대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각하는 건 오직 주위의 어린이들뿐이다. 어른들은 진실로부터 배제되고, 이와 함께 어른의 세계를 담은 영화적 레이어는 흐릿하게 사라져버린다. 그렇게 북유럽의 평범한 성장영화처럼 시작한 ‘이노센트’는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엔딩을 선사한다. 여름의 끝에 만나는 필견작이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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