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후반 음악을 듣는 가장 대중적인 방법이었던 카세트테이프. 소니 워크맨(가운데) 등 휴대용 재생 장치를 통해 간편하게 아날로그 음악을 즐길 수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에스비에스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김사부(한석규)는 어려운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거나 뭔가 해결해야 할 고민거리가 있을 때 어둑한 사무실에서 카세트 플레이어에 테이프를 넣고 올드팝을 듣는다. 그리고 이렇게 되뇐다. “역시 테이프로 들어야 제맛이야."
카세트테이프는 20세기 후반, 음악을 듣는 가장 대중적인 방법이었다. 필립스의 엔지니어 루 오텐스가 1962년 ‘답배갑보다도 작은 카세트테이프’를 개발한 뒤 카세트 데크, 붐박스 등에서 다양하게 재생했다. 특히 1979년 일본의 소니가 휴대용 카세트 리코더인 워크맨을 개발하면서 카세트테이프는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오디오 시스템을 온전히 갖추는 번거로움 없이 언제 어디서든 음악을 재생하고, 어학 테이프를 돌릴 수 있었다.
21세기 들어 엠피(MP)3, 아이팟 등에 밀려 잊혔던 카세트테이프도 레트로 흐름을 타고 다시 각광받고 있다. 아날로그의 따스함에 끌리고,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하는 이들은 엘피(LP) 수집에 공을 들인다. 찾는 이가 많아지면서 엘피는 가격이 치솟았다. 엘피를 가동하는 오디오 시스템을 갖추는 건 더 큰 비용이 필요하다, 10만원 안팎에 엘피와 엠피3 등을 재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올인원 턴테이블이 넘쳐나지만 음질이 떨어져 입문용으로 주로 쓰인다. 엘피를 제대로 재생하기 위해선 턴테이블, 앰프, 스피커 등 이른바 ‘장비’가 필수인데 모든 걸 구비하려면 수백만원이 들기도 한다.
카세트테이프는 재생장치인 플레이어와 테이프 모두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 카세트 데크의 전설로 불리는 ‘나까미찌1000 ZXL’은 500만~600만원을 호가하고, 소니가 1979년 7월 출시한 워크맨의 시조 ‘소니 TPS-L2’는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까지 등장하면서 중고품 가격도 150만원을 훌쩍 넘어선다. 하지만 카세트테이프는 고가의 재생장치가 없어도 얼마든지 그 시절 아날로그 감성을 충실하게 재현할 수 있다. 서울 동묘나 황학동에서 1980~90년대 양산한 소니 워크맨, 삼성·골드스타 등 국내 가전사에서 판매한 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를 3만원 안팎에 구할 수 있다. 아버지나 삼촌·이모가 쓰던 워크맨과 방치한 카세트테이프 몇 개쯤 갖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다. 최근 레트로 열풍을 타고 새로 출시한 카세트플레이어도 3~4만원이면 살 수 있다.
나는 엘피를 수집하지만 카세트테이프도 자주 재생한다. 엘피 가격이 너무 비싸거나 쉽게 찾을 수 없는 뮤지션의 음악을 듣기 위한 보조 수단이다. 이미자, 패티김, 은방울 자매, 산울림, 시인과 촌장 등 1960~80년대 전설적 뮤지션의 카세트테이프도 발품만 좀 팔면 1000~2000원에 구할 수 있다. 시디(CD)의 등장으로 엘피가 점차 사라지던 1990년대 중반 대중적 인기를 끌기 시작한 이은미, 삐삐밴드, 이소라는 물론 싸이 등 2000년대 두각을 나타낸 이들의 노래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도 상대적으로 손쉽게 찾을 수 있다. 이들의 엘피는 기념품처럼 소량 발매한 탓에 실물을 보기도 어렵고, 가격도 수십만원을 호가한다. 1만원을 넘지 않는 구매 원칙을 고수하려 애쓰는 짠내수집가인 나에겐 그림의 떡이다. 물론 김광석 등 누구나 찾는 뮤지션의 미개봉 카세트테이프는 수십만원에 거래되기도 하지만 대다수 중고 카세트테이프는 여전히 몇천원이면 소유할 수 있다. 지인들에게 집에 버려둔 카세트테이프 좀 갖다 달라고 하면 행복한 응답이 오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200여개의 카세트테이프를 구했다.
☞한겨레S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세요. 클릭하시면 에스레터 신청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한겨레신문을 정기구독해주세요. 클릭하시면 정기구독 신청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고장난 채로 20여년 서랍에 방치돼 있던 소니 워크맨을 직접 수리해 살려냈다. 신승근 기자
카세트테이프를 살 때는 주의해야 할 게 있다. 테이프가 늘어지거나 이른바 재생장치에 말려든 ‘씹힌 흔적’이 있는 건 가려내야 한다. 음악을 듣는 게 어려울 뿐 아니라 재생장치까지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음반사에서 정식 발매한 카세트테이프와 길거리 손수레에서 팔던 불법 복제품인 이른바 ‘길보드 테이프’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인기 가수들의 카세트테이프는 정품만큼 길보드 테이프도 많이 나돈다. 여러 가수의 히트곡만 모아둔 카세트테이프 ‘신세대 최신 톱 가요’, ‘최신 X세대 가요’ 등의 라벨을 단 것은 대부분 길보드다.
알고 사들인다면 때로는 500원, 1000원에 구한 길보드 테이프가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에 이어 삼풍백화점까지 무너져내린 1995년 “식사하셨어요? 별일 없으시죠? 괜찮으세요?”라는 노랫말이 담긴 ‘안녕하세요’를 타이틀 곡으로 한 1집 음반(문화혁명)을 낸 삐삐밴드는 ‘딸기’ 등 전위적인 명곡을 남겼다. 하지만 시디는 물론 정품 카세트테이프도 구하기 쉽지 않다. 고민하던 나는 중고 인터넷 거래 ‘당근’에서 “길보드 테이프”라고 솔직히 밝힌 이에게 샀다. 다행히 음질엔 큰 하자가 없다. 지금도 주말이면 행복한 마음으로 귀 호강을 한다.
재생장치도 저렴한 가격에 다양하게 갖출 수 있었다. 길거리 노점에서 5만원에 사들인 ‘내셔널 파나소닉 라디오 카세트 5310’, 동네 재활용 센터에서 3만원에 산 ‘인켈 더블카세트 데크 DD-4050C’ 등을 확보했다. 하지만 카세트테이프는 그 시절 가장 대중적 방식인 워크맨에 줄 달린 이어폰으로 듣는 게 제일 운치 있다. 나는 1990년대 후반에 출시한 ‘소니 워크맨 WM-GX670’을 애용한다. 그 시절 영어 공부를 하려고 마련한 것인데 20여년을 방치하다 카세트테이프를 듣기 위해 책상 서랍에서 찾아냈다. 오랜 세월 탓에 모터의 회전 동력을 전달하는 고무벨트가 끊어졌지만 황학동에서 2500원에 대체용 벨트를 구입해 유튜브를 보면서 15분 만에 살려냈다. 그만큼 손쉽고 저렴하게 아날로그 감성에 빠져들 수 있다. 주말, 그 시절 추억을 찾아 집안 곳곳을 뒤져 보자. 어딘가에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는 카세트테이프와 워크맨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