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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동에 새긴 이름들…나무는 죽을 때까지 상처를 안는다 [ESC]

등록 2023-08-05 11:00수정 2023-08-05 22:45

식물학자S의 열두달 식물일기 한여름 성장과 상처
브룩사이드 가든의 자작나무류. 사람들이 새긴 이름이 거목 둥치에 상처로 남아있다.
브룩사이드 가든의 자작나무류. 사람들이 새긴 이름이 거목 둥치에 상처로 남아있다.

여름에 미국에 오면 자주 일기예보를 확인하게 된다. 드넓은 대륙에서 밀려오는 비구름이 장엄한 만큼 비바람은 무섭게 불어닥치고, 쾌청한 하늘이 눈부신 만큼 햇빛은 강렬하고 뜨겁다. 변화무쌍한 여름 날씨는 견디기 힘들어서 경보라도 있는 날은 되도록 나가지 않는다. 뇌우와 폭우, 폭염 경보까지 있었던 어느 주말, 집에 머물기로 마음먹었는데 놀러 온 친구에게 일이 생겨 집을 나서게 되었다. 차에 시동을 걸자마자 천둥·번개가 치며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무서운 날씨에 우리는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비가 잦아들자 곧 강렬한 햇빛이 등장했다. 비바람은 짧았지만 얼마나 강력했는지 도로에는 큰 나무들이 뽑혀 쓰러져 있었다. 여름은 나무에 성장의 계절인 한편, 거친 돌풍으로 상처를 입히고 때론 생을 끝내게 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상처가 치명적이지 않다면 나무는 생존할 수 있지만 살아남아도 생채기가 남을 것이다.

우리는 일을 마치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정원인 ‘브룩사이드 가든’에서 산책했다. 여름꽃이 종종 보였지만 대부분 식물엔 잎만 무성했다. 비를 잔뜩 맞아 물을 머금은 식물들은 햇빛에 푸른 잎을 말리고 있었다. 짙은 초록색 잎들은 그 색감과 농도가 조금씩 다르게 뭉쳐 피어나 있었는데 나무들은 그 크기가 커서 푸르고 묵직한 구름이 정원 곳곳에 앉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정원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곳은 큰 연못과 정자, 그 옆에 가지가 늘어진 거대한 나무 몇 그루가 있는 잔디밭이다. 연못 가장자리 중 정원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 거대한 돌로 꾸며진 테라스 형태의 공간도 있다. 브룩사이드 가든은 연구소에서 가까워 미국 생활이 힘겨울 때 혼자서 종종 찾던 곳이다.

추모 이름인 줄 알았는데…

나는 함께 간 눈썰미 좋은 친구 덕에 4년 만에 새로운 걸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단순히 거대한 돌이라고 생각한 건 추모비였다. 2002년 워싱턴 주변에서 있었던 연쇄 저격 살인사건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에 간다고 하면 다들 한 번쯤 총격 사건을 걱정한다. 실제로 뉴스에 자주 등장해서 미국인들에게 물어보면 흔한 일이라고 얘기한다. 연구소 근처는 매우 안전한 곳이지만 나는 우연히 지난달에 총에 맞아 죽은 두 사람의 장례식에 참여하면서 미국의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다고 느꼈다. 특히 2002년 일은 이 근방에서 무척 충격적이고 큰 사건이었다.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기간 동안 27명을 죽거나 다치게 한, 미국 수도에서 일어난 대형 사건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집 밖에 나오길 꺼릴 정도였다고 한다. 여러 희생자가 난 지역 근처에 브룩사이드 가든이 있어 이곳에 추모비를 세운 것이다. 추모비엔 죽은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또 하나 새롭게 발견한 건 나무에 새겨진 이름들이다. 자작나무류의 나무둥치에 많은 이름이 있었는데 친구가 늘어진 가지들을 헤치고 들어갔다 발견한 것이다. 흰색 나무껍질이 아름다운 자작나무 둥치를 파내어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처음에 우리는 그 이름들이 추모비에 새겨진 이름과 같은 것이라고 추측했다. 유족들이 가족이 너무 그리워 추모비 근처에 새긴 것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무에게 너무 잔인한 일인 것 같아서 의아했다. 우리는 추모비와 나무에 새겨진 이름을 하나하나 비교해보았고 나무에 있는 이름은 단지 정원을 방문한 철없는 이들이 새긴 낙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름을 새기는 건 잊지 않으려 기록하는 일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두 가지의 이름 새김을 보며 우리는 생각에 잠겼다. 사람들의 상처를 기억하고 보듬기 위한 기록과 장난으로 나무에 낸 상처. 무생물인 돌에 새기는 행위와 돌같이 딱딱하지만 살아있는 생명체인 나무에 새기는 행위. 나무는 살아있기에 성장하고 성장할수록 상처는 벌어진다. 우리 몸에 남는 상처와 다르지 않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가 아니어도 우리는 마음에 남은 상처를 기억한다. 모든 생명체는 살아있는 한 상처를 계속 안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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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할수록 커지는…

생명이 있고 스스로 이를 유지해 나가는 물체, 생물의 등장을 누군가는 긴 지구의 역사에서 과학적으로 당연한 수순이라 말할 수도 있다. 46억년 전 가스로 이뤄진 지구에 천천히 물이 생기고 그 물속에서 40억년 전 최초의 생명체가 탄생했다. 시간이 흐르며 진화를 통해 많은 종이 생겼고 지금 지구엔 우리 인간을 포함해 약 870만종이 살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쉽게 생물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무생물만 있던 삭막한 지구, 그곳에 최초의 생물이 탄생한 순간을 상상해 보면 주변에 흔한 생물들이 다시 보일 것이다. 생명이 있는 물체란 말로 설명할 수 없이 경이롭다. 생명이 사라지면 생물이 죽는다는 것도 말이다. 살아있다는 건 그 끝, 죽음이 있다는 걸 의미하니까. 죽음은 생물이 무생물이 됨을, 사라짐을, 완전한 떠남을, 다시 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아무리 바란다 해도 돌에 새겨진 사랑하는 이들은 돌아올 수 없다. 생명을 잃었기 때문에. 유가족은 살아생전 마음의 상처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무는 죽을 때까지 사람들이 낸 많은 상처를 안고 있을 것이다. 나무는 돌과 달리 살아있는 생물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처럼.

이틀 뒤 친구가 여행을 끝내고 돌아갔다. 공항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헤어짐이 섭섭해 눈물이 났다. 내게 지낼 곳을 마련해주신 할머니께 ‘친구가 떠나서 울었다’고 하니 몇년 전 남편을 잃은 할머니가 얘기하셨다. “다시 만날 수 있잖니?” 변화무쌍한 여름 날씨 속에 생명이 요동치는 듯 보인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상처 나고, 죽는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소중하고 애틋하게 느껴지는 계절이다.

글·사진 신혜우 식물분류학자

미국 스미소니언에서 식물을 연구하고 있다. <식물학자의 노트>, <이웃집 식물상담소>를 쓰고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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