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S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세요. 검색창에 ‘에스레터’를 쳐보세요.
“파인애플 좋아하세요?”
영화 <중경삼림>에서 경찰223(금성무)에게 이별 통보를 한 옛 연인은 파인애플 통조림 마니아다. 만우절에 실연당한 금성무는 한 달만 기다리기로 하고 유통기한이 5월1일까지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으기 시작하지만 결국 둘은 다시 만나지 못한다. 금성무는 쌓아둔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조리 먹어치우고 다시 토해낸다. 그후 술집에서 외국어로 중얼거리듯 내뱉는 질문. “파인애플 좋아하세요?”
왜 하필 파인애플이었을까? 열대과일의 상징 같은 존재인 파인애플은 역사적으로 귀한 몸값을 자랑했다. 귀족의 과일로, 신분을 대변하는 음식으로 대접받는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하와이에서 대량 재배가 가능해지면서 대중화가 이뤄졌다고 한다. 파인애플은 생김새 덕분에 더 대접을 받았다. 모양을 본떠 벽에 무늬를 새기기도 했고, 껍질을 가공해 머리에 쓰거나 몸에 걸치는 등 의상과 액세서리로 활용할 정도로 대유행인 시기도 있었다고 한다. 파인애플을 대여하는 업체가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지금의 샤넬이나 에르메스 같은 명품이라 해도 손색 없지 않을까. 세련됨과 재력을 동시에 과시할 수 있는 그런 물건이 바로 파인애플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부티 나는 파인애플이어도 애초에 ‘그림의 떡’일 뿐인 사람도 많다. 먹고 나면 입술이 부르트거나 속이 부글거리는 등 파인애플 알레르기를 호소하는 친구들이 내 주위에도 여럿 있다. 일종의 단백질을 녹여내는 브로멜라인 성분 등의 작용 때문인데 요즘에는 이 성분을 다이어트에도 이용한다고 한다. 실제로 고기 양념에 파인애플을 갈아넣고 장시간 재워놓으면 고기가 연해지다 못해 흐물거릴 정도로 변하는 걸 볼 수 있다. 달콤한 맛에 비해 파인애플은 칼로리도 낮다. 100g당 50㎉ 정도로 다른 과일과 비교해도 낮은 편이다. 식이섬유가 풍부하고 수분 함유량도 80%가 넘어 다이어트에 적당한 과일임엔 틀림 없다. 너무 많이 먹으면 결국 살이 찌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파인애플은 바나나와 함께 수입과일의 대명사였지만 언젠가부터 국내산 파인애플도 시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2년 전 이 코너 연재를 시작하면서 처음 소개한 식재료도 국내산 바나나였다. 아열대 기후도 아닌데 우리나라에서 파인애플·바나나가 생산된다니 좀 얼떨떨 하다가도 요즘 같은 변덕 심하고 후덥지근한 날씨를 겪다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국내산 파인애플 산지는 의외로 제주도가 아니라 거제도다. 무농약으로 재배되는 자그마한 파인애플은 한국 날씨에 걸맞게 새콤달콤한 맛과 향에 쫀득한 질감까지 갖추고 있다. 땅에서 피어나는 파인애플 열매를 보고 있자면, 여기가 거제도 맞나 싶다. 기후 위기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걱정스런 현실임에 분명하지만, 그래도 맛있는 파인애플이라는 작은 선물을 주기도 한다고 위안 삼아야 할까.
파인애플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건 단연코 구워먹는 것이다. 직화로 불맛을 입혀 구우면 180도 변신한다. 먼저 파인애플의 머리와 밑동을 제거하고 가운데 심지도 제거해 4-6등분으로 길게 잘라준다. 약간의 소금과 올리브오일을 바르고 바비큐 그릴 위에 올려 겉면이 검게 그을리도록 가만히 둔다. 수분이 떨어지고 조직이 엉겨붙으면서 파인애플이 가진 당분이 타들어가면 겉면이 검게 변한다. 이때가 뒤집는 시기다. 이렇게 3면을 구워준 뒤 한김 식히거나 얼음물에 바로 담가 차갑게 식혔다가 먹으면 본래 파인애플이 가진 단맛의 서너배쯤 되는 폭발적인 맛, 그리고 씹히는 조직감까지 완벽한 상태의 파인애플 스테이크가 된다. 바비큐 그릴 위의 소고기, 돼지고기를 먹고 난 뒤라면 이만한 마무리가 또 없다. 중세의 귀족도 하와이 해변을 걷는 여행객도 부럽지 않은 나만의 여름을 즐기는 순간이 바로 이때다. 구운 파인애플 스테이크와 함께 하는, 마음만은 부자가 된 기분을 만끽하는 순간.
홍신애 요리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