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스 메카스 영화작가들과의 대화> 원서(왼쪽)와 ‘미디어버스’가 펴낸 한국어 번역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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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중혁은 책 디자인이 책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했다. 책 디자인이 책 속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은 동기를 만들고 책 내용을 시각적으로 함축하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책 디자인이 가장 과감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되는 영역은 소규모 출판 영역이다. 예술, 디자인, 출판의 교차점에 위치하면서 흥미진진한 문화가 태동하고 작가, 독자, 제작자, 디자이너의 연결이 매우 긴밀하게 이뤄지는 생태계인 셈이다. 실제로 최근 20여년 간 국내 소규모 출판 영역에서 발생한 책 문화와 디자인 경향은 주류 출판 시장에 영감을 주고 트렌드를 형성하는 에너지로 작용했다.
올해 6월14일부터 18일까지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은 이러한 소규모 출판사들의 동향을 헤아려볼 수 있는 중요한 장이었다. 36개국 530개 출판사가 참여했다. 그중 전국의 소규모 출판사를 한자리에 모으는 기획 전시 ‘책마을’에 국내 72개 출판사가 참여했다. 지금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책 디자이너의 재치와 감각을 살펴보고 북새통 속에서 보석 같은 디자인을 입은 책을 발견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6699프레스’의 책 <1-14>는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주최하고 서울국제도서전이 시상하는 ‘2023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10권 중 한 권으로 선정됐다. 한 손에 들어오는 작고 단단한 이 책은 6699프레스가 지난 10년 동안 펴낸 14권의 책을 하이라이트로 집대성한 아카이브다. 14권의 책에는 주로 북한이탈주민, 성소수자, 여성 등의 목소리와 사라져 가는 공원과 목욕탕 등 잘 드러나지 않는 존재들에 주목한 내용이 많다. 그 진정성은 곱고 나지막한 형태의 책 디자인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보기에도 아름답지만 직접 만져보면 정성껏 공들였다는 책의 물성이 물씬 느껴진다. 한지처럼 까끌까끌한 질감의 녹색 양장 표지와 살구색 내지의 조화는 책의 내용처럼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유지원 그래픽 디자이너는 심사평에서 “이 정도 수준의 물성은 행운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라며 “소신과 헌신과 탐구를 통해 얻어내는 것”이라고 밝혔다.
‘미디어버스’는 서울 종로구에 있는 서점 ‘더북소사이어티’를 거점으로 디자인과 시각예술 분야에 특화된 책을 선보이면서 국내외 저자와 디자이너, 독자를 연결하는 출판사다. 미디어버스가 이번 전시 일정에 맞춰 발행한 <요나스 메카스 영화작가들과의 대화>도 그 사례다. 리투아니아 출신 예술가 요나스 메카스는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의 선구자다. 그는 1958년부터 1977년까지 뉴욕 지역 주간지인 <빌리지 보이스>에 매주 영화 칼럼을 기고하며 수많은 영화인을 인터뷰했는데, 독일 라이프치히 기반의 소규모 출판사인 스펙터가 2018년에 그 원문을 선별하고 엮어 발행한 것이 이 책이다. 흥미로운 책이 한국어판으로 발행된 것만으로도 반가운 소식이지만 그 내용을 훌륭하게 소화해낸 책 디자인은 더욱 인상적이다. 원서의 디자인은 1950~60년대 신문과 근대 영화사에서 볼 수 있는 디자인 요소를 잔뜩 끌어왔다는 특징이 있다. 내지는 신문의 조판을 연상시키는 방법으로 원문의 본래 속성을 강조하고, 옛 영화에서 볼 법한 타이포그래피를 사용해 메카스가 평생 품었던 영화에 대한 의욕적이고 집요한 애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이렇게 당시의 텍스트와 저자, 문화적 맥락과 시간성을 긴밀하게 연결한 책 디자인을 보면, 원서를 디자인한 파비안 브레머, 파스칼 스토츠가 이 책에 얼마나 깊은 고민과 아이디어를 녹여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요나스 메카스 영화작가들과의 대화> 원서(왼쪽)와 ‘미디어버스’가 펴낸 한국어 번역판.
한국어판을 디자인한 국내 그래픽 디자이너 듀오 신신은 오리지널 디자인의 매력과 책의 재미를 국내 독자들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 원서의 디자인 요소를 계승하면서도 크고 작은 변주를 더했다. 우선 표지에서 느껴지는 미국식 근대 목각 활자 느낌과 볼드한 이미지는 서체 디자이너 장수영의 ‘격동고딕’과 파울 레너의 ‘플라크’를 섞어 짜서 기존 원서의 인상을 그대로 이끌어냈다. 또한 고전 영화의 질감을 연상시키는 제목의 ‘가운데 정렬’마저 그대로 따르고 국문과 영문을 절묘하게 배치하면서 원서의 디자인 포인트를 잘 살렸다. 신신의 신동혁 디자이너는 “원서의 훌륭한 디자인과 기획이 ‘디자인 번역’을 하는 데 큰 토대가 되어 즐겁게 작업할 수 있었던 책”이라고 말했다.
그래픽 디자이너 겸 독립출판사인 ‘그래픽하’가 발행하는 비정기 매거진 <큐티(Q.T)> 3호는 책 디자인이 독서에 재미를 부여하는 또하나의 요소라는 점을 이야기하는 책으로 눈길을 끌었다. <큐티>는 그래픽하가 직접 기획, 제작, 출판하는 독립 잡지다. <큐티> 3호의 테마가 마침 책 디자인이었다. 국내 책 디자인 프로젝트를 소개한 이번 호는 노출 제본의 멋을 그대로 드러내 책의 물성을 강조했으며, 표지로는 종이 질감이 잘 드러나는 인쇄용지 ‘알펜’을 가져와 직사각형 모양의 형압 가공을 더해 볼록한 부분이 만져지는 질감까지도 신경을 썼다. 책의 주요 소재인 종이와 책의 모양으로 대표되는 직사각 판형을 감각적으로 담아낸 것이다. 또한 책등에는 이 책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아주 작고 정밀하게 표시해 책의 재미를 더할 요소도 숨겨뒀다. 이건하 디자이너(그래픽하)는 이번 호에 이렇게 디자인 장치를 곁들인 이유에 대해 “다양한 매체와 기술이 등장하는 오늘날 책이 가진 고유한 매력과 재미를 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서울국제도서전을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양손에 무겁게 들고 귀가하는 길은 익숙하다. 전자책이나 오디오북, 책의 내용을 짧게 줄여서 제시해주는 요약 콘텐츠, 책 속의 명문을 발췌해주는 앱 등 다양한 서비스가 공존하는 오늘날, 책 디자이너의 날카로운 감각과 섬세한 물성 표현 등을 살펴보는 건 또 하나의 독서법이 될 것이다.
유다미 프리랜서 기자
사진 각 출판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