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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초록 앞에서…걸음이 느려진다 [ESC]

등록 2023-06-18 09:00수정 2023-06-18 09:56

김남희의 걷다 보면 코스타리카 ②

어딜 가나 꽃·나무·원시림 가득
열대우림 걷는 ‘밤 산책’도 인기
‘순수한 삶’ 뜻하는 “푸라 비다”
이곳에서 가장 흔히 쓰는 인사말
코스타리카의 산림보호구역 몬테베르데의 숲길.
코스타리카의 산림보호구역 몬테베르데의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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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월 가는 비 흩뿌리는 아침, 나는 코스타리카의 여름 숲에 서 있었다. 비에 젖은 열대의 숲은 맹렬하게 서로를 향해 팔을 뻗은 나무들로 몽환적인 분위기에 휘감겨 있었다. 검은 나무의 몸피마다 초록의 이끼나 덩굴식물이 가득했다. 서로 몸을 얽은 푸른 잎들이 빗방울을 매단 채 늘어져 있었고, 차가운 안개가 숲을 제 품에 가두었다 풀어놓기를 반복했다. 저마다 결이 다른 무수한 초록으로 채워진 공간에 원시적인 선정성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잎들 사이로, 가지들마다, 큰 나무들 너머로 빗줄기가 소리도 없이 스며들었다. 길이 아닌, 숲으로 발을 내딛고 싶었다. 뒤엉킨 가지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면 다른 차원의 세계가 열릴 것만 같았다. 가까이서 하울러 멍키(고함 원숭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눈앞에서 붉은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잠시 깨졌던 숲의 정적이 다시 찾아오고, 흔들리던 나뭇가지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어떤 대가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초록색을 풀어 자유롭고 호방하게 붓질을 한 듯한 숲이었다. 앙리 루소나 김보희의 그림 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은. 아쉬움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하던 그 숲의 이름은 몬테베르데. 그 이름대로 초록산에 들어 푸른 물에 흠뻑 젖은 하루였다. 숲을 빠져나오니 짧고 애틋한 꿈을 꾼 것 같았다.

코스타리카는 어디나 열대우림이었다. 내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나무와 꽃이 가득했고, 조림하지 않은 원시림이 많았다. 나는 이틀에 한 번씩 국립공원을 옮겨 다니며 산과 바닷가와 숲을 걸었다. 인생이 이렇게 풍요로워도 되는 건가. 문득 두려워질 정도로 매 순간 생명의 환희가 일렁였다.

제대로 보려면 필요한 ‘속도 조절’

코스타리카에서 걷는 자는 시간을 잊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걸음과는 완전히 다른 속도로 걸어야 하기에. 평소 걷던 속도를 버리고 느리게 걸어야 한다. 그래야만 주변의 나무와 숲과 하늘에 시선을 둘 수 있다. 시선을 주고 기다려야만 숲에 깃든 생명을 만날 수 있다. 이 나라 트레킹에서 제일 힘든 점은 ‘열대우림’답게 비가 자주 내려 진흙탕이 되는 길도, 후텁지근한 습도와 살갗에 달라붙는 더위도 아닌, 속도 조절이다.

코르코바도 국립공원에 나타난 아구티.
코르코바도 국립공원에 나타난 아구티.

나무늘보처럼 느릿느릿 걸으며 숲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조금씩 시선이 열리게 된다. 나뭇가지에 몸을 감고 천천히 가지를 건너가는 긴 형광 연둣빛 뱀이, 덩치가 새끼 돼지만 한 설치류 아구티가 나무뿌리 사이로 고개를 내민 모습이, 라쿤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주행성인 코아티가 코를 킁킁거리며 먹이를 찾는 모습이, 거대한 몸체를 끌고 뒤뚱거리듯 걸어가는 새 크레스티드 구안(볏봉관조)이, 나뭇가지에 다리를 걸고 잠에 빠진 두발가락 나무늘보가, 키 큰 나무의 꼭대기 가지에 앉은 투칸의 노란 부리가, 속도를 늦추고 걸음을 멈춘 이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

수백년을 살아온, 세월에도 더 성성해지는 나무들은 또 어떤가. 앙코르와트의 유적을 뚫고 자라나는 걸로 유명한 케이폭 나무의 땅 위로 뻗어 나간 뿌리와 압도적인 몸피. 온몸에 푸른 이끼를 두르고 서로의 몸을 지지대 삼아 뻗어 나간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나무들.

그렇게 숲에 사는 무수한 생명과 눈을 맞추며 감탄하고 신기해하며 걷다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맞아, 지구는 원래 이런 곳이었지. 다양한 생명이 어울려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지. 오래전에는 어디나, 누구나 이렇게 살았겠지.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그래서 코스타리카의 야생은 그 어느 곳과도 다르다. 인간의 손길이 채 미치지 못해 막막할 정도로 강대한 자연의 힘을 깨닫게 되는 파타고니아와도 다르고, 일체의 생명이 절멸한 후의 지구를 상상하게 하는 아이슬란드와도 다르다. 코스타리카는 인간과 동물이, 도시와 자연이 경계나 구분 없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곳 같았다.

코스타리카의 산림보호구역 몬테베르데의 숲길.
코스타리카의 산림보호구역 몬테베르데의 숲길.

코스타리카에서는 ‘밤 산책’(Caminata Nocturna)의 기쁨도 빼놓을 수 없었다. 어두운 밤에 가이드와 함께 정글을 걸으며 야생동물을 찾아보는 투어다. 밤 산책을 하기 전에는 몰랐다. 밤의 열대우림이 얼마나 풍부한 표정을 지녔는지를. 검은 하늘을 촘촘하게 채운 별들도, 옷깃을 여미게 하는 서늘한 밤의 공기도, 짝을 찾는 벌레들의 가냘픈 울음소리도, 무성한 잎들을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의 노래도, 나뭇가지 위 깃털 사이로 부리를 파묻고 잠든 투칸도, 손전등 불빛에 형광색으로 빛나는 작은 스콜피온도, 먹이를 노리며 나뭇잎 위에 앉아있는 붉은 눈의 독개구리도, 저마다 존재감을 내뿜으면서도 조화로운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무수한 생명을 거둬 안은 밤의 숲은 마법의 성 같았다. 깊고 어두운 세계 안에는 잠든 생명과 깨어있는 생명이 공존하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숲은 저 홀로 고요히 분주했다.

닭에서 돼지로 가축 바꾼 이유

푸라 비다(Pura vida, 순수한 삶). 코스타리카에서 반복적으로 듣고 쓰게 되는 말이다. 가게에서 물 한 병을 산 뒤에도, 점심을 먹은 식당에서도, 투어를 알아보러 간 여행사에서도 누구나 말끝에 푸라 비다를 붙였다.

푸라 비다는 다양하게 응용되는 표현이었다. “오늘 기분 어때요?” “푸라 비다!(좋아요)” “음식은 어때요?” “푸라 비다!(맛있어요).” “안녕하세요!” “푸라 비다!(안녕하세요)”

멕시코인들이 코스타리카를 묘사할 때 “이 나라에는 순수한 삶이 살아있다”고 한 데서 시작되었단다.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이 말을 어디에나 갖다 붙이고, 관광 마케팅에도 알뜰히 써먹고 있다. 코스타리카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도 ‘푸라 비다’를 쓰는 횟수가 늘어났다. ‘푸라 비다’로 표현되는 자연에 깃든 충만한 삶을, 소박하고 생명력 넘치는 삶의 기운을 지나가는 나조차 느끼게 되었으니.

야생의 자연이 살아있는 코스타리카에서도 원시의 생태계로 손꼽히는 곳은 서남단 끝의 코르코바도 국립공원이었다. 세상 어느 나라나 ‘땅끝 마을’은 다다르는 데 시간이 걸린다. 내가 머물던 몬테베르데에서 아침 첫 버스를 탔는데도 코르코바도에 도착하니 오후 4시. 국립공원 매표소는 이미 오후 3시에 문을 닫아 다음날 입장권 예약이 불가능했다. 지구의 동물 종 전체의 5%가 코스타리카에 사는데, 그중 절반이 이 국립공원 지역에 거주한다고 했다. 땅끝까지 내려왔는데…허탈했다.

코르코바도 국립공원에 나타난 카푸친 원숭이.
코르코바도 국립공원에 나타난 카푸친 원숭이.

결국 이튿날 코르코바도에서는 가이드와 함께 국립공원 외곽의 숲과 해변을 걸었다. 몇 종의 야생동물을 만난 뒤 마지막 순서로 그가 자신의 오두막으로 우리를 데려가 점심을 제공했다. 문명의 끈이 완전히 끊어진 깊은 숲 속에 손수 지은 오두막은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비가 들이치는 열린 구조의 판잣집. 전기도 수도도 없이, 지닌 것도 거의 아무것 없이 돼지 몇 마리를 키우며 살아가는 자연인이었다.

점심을 먹는 동안 그가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이야기했다. “계란을 얻으려고 닭 몇 마리를 키워봤는데 매번 재규어가 물어가서 결국 포기했어. 이 숲은 원래 그들이 주인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대신 재규어가 물어가기 좀 더 힘든 돼지로 바꿨어.”

코스타리카는 그렇게 인간이 동물의 영역을 존중하며 공존해가고 있었다. 결국 다른 종과 공존한다는 건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는 삶으로 전환하는 일이 아닐까. 이 나라 사람들은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일상에서 무수한 불편함을 견뎌내고 있을 것이다.

1회용품 없는 투어

우비타 해변의 모습.
우비타 해변의 모습.

코르코바도를 떠나 올라간 우비타에서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우비타에서 배를 타고 코르코바도 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하이킹 투어가 있었다. 우비타의 마리노 바예나 국립공원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남짓 가면 코르코바도 국립공원의 산 페드리요 스테이션. 여기서 내려 국립공원을 세 시간 남짓 걸으며 야생동물을 찾아보고, 강에서 수영도 하고, 점심도 먹은 후에 다시 배를 타고 우비타로 돌아오는 8시간짜리 투어. 돌고래 몇 마리와 브라운 부비, 펠리컨 떼가 우리의 뱃길을 전송했다.

산 페드로 스테이션에 도착하자마자 파크 레인저가 우리를 불렀다. 그가 가리키는 바스켓 안에 뭔가 꼬물거리는 작은 것들이 있었다. 세상에나. 어머나. 모두에게서 탄성이 터졌다. 그 전날 알에서 부화한 새끼 거북이 47마리였다. 탁구공만 한 거북이들이 바스켓 안에서 꼬물거리는데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그 안에 다 담긴 것 같았다.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 거북이를 데려와 포식자들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 바다로 보낸다는데 저 중에 살아남아 성체가 되는 건 서너 마리 정도. 열 마리 중 한 마리가 겨우 살아남아 바다거북이가 된다니, 얼마나 잔인한 삶인가. 꼼지락거리는 새끼 거북이들의 생존을 바라는 인간이라는 종의 다정한 기운이 그 작은 생명에게로 건너가고 있었다.

새끼 거북이를 본 흥분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우리에게 찾아온 선물은 개미핥기. 나무 위에서 개미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개미핥기는 생각보다 덩치가 컸고 얼굴은 어딘가 맹한 귀여움이 가득했다. 투칸 세 마리, 마코앵무 커플, 나무늘보 세 마리, 아구티 몇 마리, 코아티 대여섯 마리, 스파이더 멍키와 하울러 멍키들, 빨간색 날개가 아주 강렬한 트로곤, 둥지 안의 회색 쿠라사오 새끼 등등. 더 많은 야생 동물을,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던 시간이었다. 혹시나 싶었지만, 역시나 야행성인 퓨마나 재규어는 눈에 띄지 않았다.

코르코바도 국립공원에서 가이드가 생수와 식사를 나르고 있다.
코르코바도 국립공원에서 가이드가 생수와 식사를 나르고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지구에서 생명 다양성이 가장 풍부한 곳”으로 이곳을 꼽았다더니 과연! 20만원 가까이 지불한 데이 투어는 프로그램 진행이 꽤 좋았다. 5년 전부터 생수병을 나눠주지 않고 가이드들은 무거운 정수 물을 들고 다니며 여행객들이 각자 가져온 물통에 물을 담아준다. 심지어 이 더위에 필수적인 얼음물이다.

하이킹이 끝난 뒤에는 국립공원 스테이션에서 미리 준비해온 점심을 먹는데 과일과 샐러드, 가요 핀토(이 나라 국민음식으로 밥과 콩·채소를 함께 삶은 밥), 디저트까지 다 맛있었다. 접시는 물론 물컵과 수저까지 1회용품을 전혀 쓰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이드가 열성적이었다. 생태계에 대한 지식도 풍부해서 설명도 잘하고. 다만 열성이 지나쳐 트레일(걷기가 허용된 길)을 벗어나 야생동물을 찾으러 다니면서 “파크 레인저들은 트레일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하지만 동물들은 안 기다려준다”며 합리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까지는 안 해도 된다고 부드럽게 지적했지만 그는 또 같은 말을 하며 트레일을 벗어났다. 그 순간, 아기거북이를 보호했다가 바다로 돌려보내는 이들의 손길이 떠올랐다. 나는 잠시 기도하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아기거북이의 생과 사에 조심스레 개입했을 이들의 겸허한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글·사진 김남희 여행가

여행가 김남희는 2003년 이후 유목민의 삶을 살아오고 있다. 언젠가는 앉아서 유목하는 경지에 오르기를 바라면서, 지은 책으로는 <길 위에서 읽는 시> <여행할 땐, 책>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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