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오전 이탈리아의 한 공원에서 박재용씨가 달리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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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11일부터 우연히 매일 어떻게든 달리기를 시작하고서 어느덧 1200일을 향해 가고 있다. 주로 집 주변을 가볍게 달렸지만, 때로는 언덕이나 산을 달려 오르기도 하고, 미세먼지 가득한 날엔 집 안에서 제자리 뛰기를, 개복 수술 이후에는 달리기 게임에 도전하며 명상에 집중하기도 했다. 달리기는 그 길이와 강도, 장소와 시간을 떠나 늘 새롭다. 그리고 놀랍게도 매번 힘들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반복되는 어려움 속에 조금씩 경험과 체력이 쌓여간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번 국외 출장지에서의 달리기는 이전보다 좀 쉽지 않을까 기대했다. 3주 유럽 출장은 매일 달리기를 시작하고서 세번째 국외 일정이다. 이전 출장에도 동행했던 두세 벌가량의 달리기 복장을 이번에도 그대로 챙겼다. 내 몸에 착용하는 아이템 중 지난 출장과 달라진 건 신발뿐이다. 매일 평균 3㎞ 정도 뛰다 보니, 1년에 한 번은 신발을 새것으로 바꿀 수밖에 없다.
동행인이 늘면서 이번 출장은 더욱 특별해졌다. 작년 여름 출장 때 배우자 배 안에서 자라고 있던 딸아이 ‘이서’가 태어났고, 세상에 나온 지 6개월 만에 유럽을 구경하게 됐다. 달리기와 함께한 국외출장 경험 덕에 달리기 옷과 신발은 큰 지퍼백에 말아 넣어 부피를 확 줄였지만, 기저귀를 비롯한 각종 육아 도구까지 챙기는 일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나는 ‘걸어 다니는 수하물 타워’ 역할을 맡기로 했다. 배우자는 아기와 유아차를 책임지는 것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나는 23㎏(이코노미 좌석 수하물 최대 무게)에 무게를 맞춘 거대한 배낭을 등에 지고, 가슴에는 15㎏ 나가는 배낭을 둘러맸다. 남은 손으로는 23㎏에 맞춘 짐가방을 끌었다. 짐의 절반 이상이 육아용품이었다.
지난 14일 인천공항에서 늦은 오후에 출발한 비행기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비행시간이 늘어나 13시간 만에 이탈리아 밀라노공항에 도착했다. 나는 육군훈련소에서 야간행군을 하던 기억을 떠올렸고, 태어나서 처음 국제선 비행기를 탄 아기는 짐짓 피곤해 보였으며, 아기용품만 담은 가방과 유아차를 챙기느라 신경을 쓴 배우자도 겪어본 적 없는 긴장과 피로를 느끼는 듯 보였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시내로 이동했겠지만 장거리 비행에 진이 빠진 우리는 공항 건물과 이어진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휴식과 재정비의 시간을 보냈다.
아이와 배우자가 모두 잠든 뒤, 나는 달리기 옷으로 갈아입고 24시간 열려 있는 호텔 내 피트니스룸으로 이동해 트레드밀 위에서 가볍게 뛰어보았다. 천일 동안 대부분 야외에서 뛰었던 내게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춘 곳에서의 실내 달리기는 귀한 경험이었다. 이튿날 아침에도 피트니스룸을 다시 찾아가 또 뛰었다. 60㎏이 넘는 짐을 들고 시내 숙소까지 이동하고 나면 달리기를 할 힘이 남아 있지 않을 수 있다는 마음에 ‘보험을 들어 놓듯’ 미리 뛰어둔 셈이다. 체크아웃 시각이 다가오자 나는 다시 한 번 ‘걸어 다니는 수하물 타워’로 변신했다.
밀라노 시내 숙소에서는 너무 늦지 않은 시각에 잠이 들었다가 새벽 3시(한국시각으로는 오전 10시)에 불현듯 일어나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해가 뜨는 시각인 오전 6시 즈음엔 잠시 업무를 멈추고서 숙소 인근의 공원과 지도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밀라노는 그다지 달리기 친화적인 도시라고 할 수 없는 곳이었다. 한국의 주요 도시보다는 낫지만 유럽의 다른 도시에 비해선 공기도 그리 좋지 않고, 거리의 포장 상태도 울퉁불퉁한 편이기 때문이다. 밀라노에서 그나마 달릴 수 있는 곳은 시내에 몇 군데 있는 큰 공원들이다.
마침 숙소에서 왕복 4㎞ 거리에 20세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언론인(으로 알려졌지만 뒤늦게 인종차별주의자로 비판받고 있는) 인드로 몬타넬리를 기리는 큰 공원이 있다는 걸 확인한 뒤, 달리기 복장을 하고 숙소를 나섰다. 밀라노에 마지막으로 들렀던 건 2019년 4월이었다. 규칙적인 운동은 꿈조차 꾸지 않았던 2019년 당시 바쁜 걸음으로 지나쳤던 건물과 거리를 새벽 달리기를 하며 다시 마주쳤다. 새 생명을 양육하며 내 삶을 한 번 더 경험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처럼, 내가 지금까지 알았던 도시에 달리기라는 차원이 하나 더 씌워져 완전히 새로운 공간처럼 느껴졌다. 새벽부터 출근을 서두르는 자동차가 붐비는 시내를 지나 도착한 공원에는 달리기의 기운이 넘쳤다. 옷차림만으로도 꽤나 진지한 달리기 애호가라는 사실을 인증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대체 다들 어디서 오신 건가요? 근처에 또 뛸 만한 곳은 어디인가요? 그곳의 모든 사람에게 묻고 싶었지만, 각자 자기만의 리듬에 몸을 싣고 달리는 사람들의 흐름을 끊는 건 달리기 애호가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나만의 리듬으로 달리는 것만이 나와 상대방, 그리고 달리기에 대한 존중을 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달리기를 하다 혹시 눈이라도 마주치면 반갑게 목례를 하고 다시 달려가던 길을 가면 된다. 누군가 그처럼 이른 시각에 달리기를 위해 옷을 갖춰 입고서 뛰고 있다면, 서로 무언가 설명할 필요는 없다. 이 동네 주민이나 외국에서 온 달리기 애호가나 이미 어렴풋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오늘의 날씨에 맞춰 가장 상쾌하게 달릴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지금이고, 자동차 매연 속에서 행인들과 부딪힐 염려 없이 마음 편히 뛸 수 있는 곳은 바로 이곳뿐이라는 사실을.
국내·외를 막론하고 출장지에서 달리기를 하면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비슷한 시각, 비슷한 장소에서 따로 또 함께 달리게 되는 일이 많다. 세계 어디에서든 지도를 검색하고,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을 알아보고, 그날의 날씨를 찾아본 뒤 달리기 좋은 시간과 장소를 고민하는 사람은 항상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은 대체로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 달리기 좋은 때에 달리기 좋은 장소에 가면 언제든 달리는 이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 몇 주 동안 배우자, 아기와 함께 ‘걸어 다니는 수하물 타워’가 되어 출장을 온 나 역시 마찬가지다.
글·사진 박재용 프리랜스 통번역가·큐레이터
서울을 중심으로 현대미술과 영화계에서 주로 일한다. 인스타그램 @one_day_one_run에 명상과 달리기를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