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취미인 사람들이 진짜 있다. 평생 취미를 모르고 살았던 나의 아버지가 노년에 찾은 취미 생활이 바로 공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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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 교육인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그리고 고등학교 3년, 대학까지. 한국의 많은 사람이 인생에서 10년이 넘는 시간을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공부하며 산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오래전 나의 고3 시절 하루는 아침 6시에 일어나 새벽밥 먹고 0교시부터 오전 공부를 하고, 점심 먹고 오후 공부를 하고, 저녁 먹고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걸로 채워졌다. 아마 그때나 지금이나 전국의 고3 중에 ‘난 정말 공부가 좋아’ 라고 말하는 이는 많지 않을 거다. 입시를 위한 공부는 우리의 자유 의지로 선택한 공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얼마 전 마음이 착잡해지면 수학 문제를 푸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도대체 왜? 궁금해서 조금 더 알아봤더니 그런 사람이 꽤 있었다. 미래 준비 등 실용적인 이유가 아니라, 재미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아니, 그걸 왜 해? 취미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왜 공부를 하는지 물어봤다.
50대 회사원 박승욱씨의 뇌과학 관련 공부 노트. 박승욱 제공
새벽별 보며 와인 공부
50대 회사원 박승욱씨는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문과생으로 살아왔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오래 글 쓰는 직업을 가졌고, 여전히 문학도의 삶을 산다. 그런데 3년 전부터 뇌과학을 공부 중이다. 2010년경 뇌과학자 박문호 박사의 <뇌, 생각의 출현>이라는 책을 읽다가 뇌과학에 ‘꽂혔다.’ 시민학습모임인 사단법인 ‘박문호의 자연과학 세상’의 오프라인 강의를 찾아가며 뇌과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뇌과학은 뉴런, 시냅스 같은 과학 영역의 공부와 함께 ‘프리드리히 니체나 음악가의 창의성은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가?’ 같은 질문을 해석해야 하는 복합 학문에 가까운 것이라고 했다. 본인과 별 상관없는 분야를 왜 공부하냐는 질문에 그는 어느 할머니의 편지에 대해 말했다. 80대에 노인학교에 가서 한글을 깨친 할머니가 딸에게 처음 편지를 쓰면서 “너의 이름 석 자를 이렇게 쓰고 보니, 네가 처음 태어나서 너를 안았을 때 같다. 너를 처음 보고 있는 것 같은 마음이 들고, 벅차오른다”라고 썼단다. 과학 공부를 하는 그는 이제 막 글을 깨친 할머니처럼 세상이 달리 보인다고 했다. “그동안 해 뜨면 해 뜨나 보다, 달 뜨면 달 뜨나 보다 하고 살았다. 그런데 과학의 언어로 세상의 많은 현상을 바라보니 지금까지 과학에 너무 무관심했던 삶이 안타까우면서도 몰랐던 것을 깨우쳐가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다”고 말했다. “무엇이 되고 싶다, 학문적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실용의 관점이 아니라 순수하게 너무 재밌어서 공부하는 이들이 세상에 너무 많다”고도 덧붙였다. 그가 듣는 과학 강의에 가면 나이 지긋한 분들이 자연과학에 대해 열성적으로 수업을 듣고 열띤 토론을 펼친다고 한다.
카피라이터로 일하는 30대 박민지씨는 지난해에 와인 소믈리에가 되었다. 좋아하는 분야를 더 체계적으로 알고 싶어서 공부한 케이스다. 민지씨는 서울 서초구 더블유에스에이(WSA) 와인 아카데미에서 국제 와인 전문가 및 교육 인증 기관인 더블유에스이티(WSET) 국제 와인 자격증 수업을 들었다. “와인을 즐겨 마시면서도 어떤 와인은 맛있고, 어떤 와인은 맛없는데 무엇 때문인지 기준을 몰라서 헤맸어요. 와인은 어떤 온도로, 언제 마시느냐에 따라서도 맛이 달라지잖아요. 공부를 하면 입맛에 맞는 와인들을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와인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서 새벽 서너시까지 공부하다 잔 날도 많았다고 한다.
공부, 참 지긋지긋하다 싶지만 이처럼 주변을 둘러보면 꽤 가까운 지인들이 취미처럼 공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아버지 허성학씨처럼. 그는 평생 취미라는 걸 모르고 살았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그랬다”라고 무뚝뚝하게 말씀하시는데, 그가 노년에 찾은 취미 생활이 바로 공부다. 오랜 공무원 생활 은퇴 후 앞으로 주어진 긴 노년의 시간을 본인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길은 무엇일까 고민하다 공부를 선택한 케이스다. 1950년대 태어난 부모 세대 대부분처럼 아버지도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 은퇴 후 다음 해에 방송통신대학에 등록하더니 지금까지 14년 동안 학과와 학교를 바꿔 가며 학생의 삶을 살고 있다. 방송통신대학의 경우 만학도, 직장인들이 많아 고등학교 졸업자의 경우 수능 시험을 보지 않고도 지원할 수 있다. 온라인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캠퍼스 개념의 지방 본부에서 행정 업무 등을 진행해 전국 어디에서나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아버지 공부 왜 하세요? 아들의 뜬금없는 질문에 아버지는 교과서에나 나올만한 답을 했다. “자신을 함양하고 자아의 성찰을 하기 위해.” 표현이 예스럽긴 해도, 해마다 “올해는 이걸 공부한다”고 자랑하는 아버지를 오래 보아온 나는 그의 말이 진심임을 안다.
뒤늦은 와인 공부에 푹 빠진 박민지씨의 교재 모습. 박민지 제공
쓸모를 떠나 좋아서 하는 일
한국의 교육 시스템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은 공부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다. 공부를 싫은 것, 힘든 것으로 느끼게 만든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뇌과학자 박문호 박사는 어느 강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디에 써먹으려고 공부하지 마라, 공부는 그런 게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부분은 ‘어디에 쓰기 위해 해야 하는 게 공부’라고 공부해오지 않았던가.
몰입의 즐거움을 강조한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인간의 속성은 창의적인 순간에 가장 큰 행복을 느끼고, 더불어 제한된 자아감을 극복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우월하게 느끼고 행복을 느낀다”고 말했다. 마치 운동을 잘하고 싶은 것처럼, 외모를 꾸미고 싶은 것처럼 자신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인간의 기본 욕망이 투영된 행동. 그렇게 보면 공부는 취미일 수 있다. 좋아서 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허진웅
광고회사 이노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낚시든, 악기든, 오토바이든, 세차든, ‘너 좋아하는 게 뭐야?’ 라고 물었을 때 무언가 한가지 서슴없이 대답할 수 있는 삶이야 말로 좋은 삶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