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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짓수에서도 입씨름이 통할까 [ESC]

등록 2023-03-11 10:00수정 2023-03-11 10:34

#오늘하루운동 주짓수
싸움에서도 때때로 말하기의 기술이 요구된다. 박종혁 제공
싸움에서도 때때로 말하기의 기술이 요구된다. 박종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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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여느 날처럼 스파링 중이었다. 대결하던 상대가 한 말에 주의력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천사라니, 내가 쓸데없이 착하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닌데? 일종의 교란 작전인가, 회유책인가, 아니면 설마 조롱인가? 번잡한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하더니 걷잡을 수 없이 길어졌다. 스파링 중에 웬 딴짓이냐고 할 수 있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싸우는 중일수록 최소한의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주짓수에서는 항복하고 싶을 때 손으로 탭(tap)을 치는 게 보통인데 만약 팔이 묶여서 꼼짝할 수 없다면 (비록 체면이 구겨질지라도) 발이라도 동동 굴러야 한다. 최악의 상황이라서 발마저 묶였다면 ‘탭’이라고 소리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주짓수에는 ‘버벌 탭’(verbal tap)이라는, 말로써 항복하는 행위를 일컫는 용어도 따로 있다.

‘킬 빌’ 속 언어적 자기방어

싸움에서 언어가 맡는 역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하다. 우선 짤막한 말 한마디가 스파링 중에 고조된 긴장을 늦추거나 분위기를 환기하는 경우가 많다. 또 실수로 상대를 때렸거나 들이받았을 때 사과의 뜻을 전하기도 한다.

나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갔다. ‘말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하는 게 싸움이라면 물리력은 이미 최대로 휘두르고 있으니 남은 건 말뿐이다. 힘이나 기술로는 밀리더라도 말로써 승기를 잡을 수 있다면 침묵 속에서 싸우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 아닐까?

알고 보니 비슷한 아이디어에 착안해서 ‘언어적 자기방어’(verbal self defense)라는 개념을 만든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급습하는 상대를 격투기로 제압하듯 말로써 정신의 안정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언어적 자기방어의 핵심은 단순하다. 어떤 상황에서든 상위 포지션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주짓수처럼 상대에게서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아 최대한 오래 유지하는 거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언어적 주짓수(버벌 주짓수, verbal jiu jitsu), 언어적 유도(verbal judo) 등에 관한 책이 출간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말장난 같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발상이다. 우리도 팽팽한 말다툼을 일컬어서 ‘입씨름’이라고 하지 않는가. 씨름이 한국형 그래플링(Grappling, 얽혀서 싸운다는 뜻으로 주짓수, 레슬링, 유도, 이종격투기를 포함한다)임을 고려하면 우리는 배운 적도 없는 언어적 자기방어를 삼국시대부터 실천해온 민족인 셈이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싸움과 대화에 관한 집착적인 애정으로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개성 강한 영화를 만들어온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만든 영화 속 인물들은 몸으로 싸울 뿐만 아니라 입으로도 맹렬하게 싸운다. 놀라운 점은 수다에 가까운 설전이 싸움의 긴장을 늦추거나 흐름을 방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싸움을 더욱 재미있게 하는, 예열의 기능을 한다는 거다. 싸움 전후에, 또는 싸우는 도중에 한참 동안 오가는 타란티노식 대화는 두 사람의 성격, 그동안의 서사, 관계의 지형을 무척이나 흥미진진하게 드러낸다.

그의 화려한 필모그래피 가운데 가장 빛나는 작품인 <킬 빌>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킬 빌> 1부의 첫 시퀀스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이 시퀀스는 주인공 키도가 첫 번째 복수 상대인 버니타 그린의 집에 찾아가면서 시작된다.

4년 전 임신 중이던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원수가 교외의 그럴듯한 집에서 완벽한 주부 노릇을 하는 걸 보면서 키도는 새삼스럽게 증오에 휩싸인다. 드디어 버니타와 대면하는 순간 복수할 대상과 마주할 때마다 나오는, 그 유명한 배경 음악이 흐르고 둘은 음악을 신호 삼아서 싸우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에 버니타의 딸 니키가 학교에서 돌아온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싸움을 잠시 멈추고 키도가 니키에게 몇 살이냐고 묻는다. 그리고 덧붙여서 “내 딸도 살아 있다면 너와 같은 네 살”이라고 말한다. 타란티노의 다른 영화에 비하면 비교적 간결하고 압축적인 대사 몇 마디만으로도 관객은 <킬 빌>이 혈육과 복수에 관한 영화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싸움이 중단된 김에 쉬어갈 겸 두 여자는 부엌에서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내리던 버니타는 키도가 어떤 커피를 좋아하는지 잊지 않고 기억해낸다. 그 정도로 둘은 한때 친밀한 사이였다. 버니타는 이 점을 이용해서 딸이 보는 앞에서 죽이지 말라고 부탁하는데 사실은 얄팍한 속임수다. 키도가 부탁을 들어주며 잠시 방심한 틈에 버니타는 숨겨둔 권총을 뽑아 든다. 하지만 4년이나 쉬었던 탓인지 총알은 빗나가고 버니타는 키도가 던진 부엌칼에 살해된다.

그리고 키도의 의도와 다르게 니키가 엄마의 죽음을 목격하고 만다. 일이 크게 잘못됐음을 직감한 키도는 친구의 어린 딸에게, 너무나 영화 주인공 같은 말을 건넨다. “어른이 돼서도 잊을 수 없으면 나를 찾아와.”

싸움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한편 이 영화에 등장하는 또 다른 인물은 “복수는 숲”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방향을 잃기 쉽다는 뜻이다. 이미 첫 시퀀스에서 인간적인 약점을 드러낸 주인공이 복수의 종착역까지 가려면 무척 험난한 여정이 펼쳐질 게 예상되고도 남는다.

그는 러닝타임 내내 초인적인 암살자가 아니라 과거에 얽매인 한 인간으로서, 지독한 트라우마와 맞서 싸운다. 복수할 대상은 옛 친구, 동료, 연인이고 그들이 자꾸만 키도의 인간성을 자극한다. 아직 인간성을 다 죽이지 못했는데 복수가 순탄하게 진행될 리 없다. 키도는 일본검 한 자루를 들고 복수라는 숲에서 길을 잃는다.

<킬 빌>에서 오가는 대사는 겉으로 드러난 사건의 이면을 비추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타란티노가 이례적으로 대사의 양을 줄이고 액션을 돋보이게 만든 영화임에도 오히려 더 대사에 집중해서 보게 된다. 다 보고 나서도 쾌감 어린 액션 장면보다 대사가 더 기억에 남는 기묘한 영화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나서, 황당했던 천사 사건의 전말도 드러났다.(비슷한 상황에서 똑같은 말을 또 들었다) 코로나가 두려워서 쓰고 있던 마스크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 귀가 문제였다. 듣고 싶은 대로 듣는 버릇이 있는 내 귀가 ‘전사’를 ‘천사’로 잘못 접수한 거다. 주짓수든, 말싸움이든 승기를 잡으려면 상황을 똑바로 인지하는 게 최우선인데 역시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양민영 작가

사회적기업 운동친구의 대표이며 「운동하는 여자」를 썼다. 페미니즘과 여성의 운동에 관한 콘텐츠를 만들고, 못 하는 일에 도전하기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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