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리우 삼바 카니발 퍼레이드. 노동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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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인류에게 가장 큰 고통은 겨울이었다. 불 지필 나무와 수렵·채집할 동식물이 줄어들자 동사, 아사에 이어 먹이를 차지하기 위한 동족 간 싸움이 벌어졌다. 점점 길어지던 밤이 멎을 무렵(동지) 비로소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밤보다 낮이 길어질 무렵(춘분)이면 사냥할 동물이 들판을 뛰어다니고 열매 맺을 나무에 꽃이 피고, 인류는 환희의 절정을 느꼈다. 채팅방에 접속해서 공모하진 않았지만 한결같은 심정이었다.
“새봄을 기뻐하며 잔치를 벌이자!”
겨우내 이부자리로 사용한 짚, 나뭇잎, 잔가지를 모아 불을 지피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췄다. 수만 년에 걸쳐 반복된 의식은 인류의 디엔에이에 또렷이 각인되었다. 농사를 짓고 도시를 건설하면서도 새봄·새해(인류가 계절을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부르는 건 ‘봄’을 새해의 시작으로 여기기 때문이다)를 기리는 전통을 잊지 않았다.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새봄맞이 축제는 인류 공통의 문화가 되었다. 바빌로니아의 신년 축제, 이집트의 이시스 축제, 페르시아의 노루즈 축제,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축제, 배달족의 동지·대보름에 이르기까지. 현재 가장 널리 퍼진 새봄맞이 축제는 ‘카니발’이다.
삼바드로메 경연장의 카니발 퍼레이드. 노동효 제공
삼바드로메 경연장의 카니발 페레이드. 노동효 제공
모두 평등한 해방의 날
지난 2월 지구 곳곳에서 카니발 축제가 열렸다. 기독교 축제로 알려져 있으나 기원은 바빌로니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4천 년 전 바빌로니아인은 태양력(365일)과 태음력(354일) 사이에 11일가량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새해로 넘어가기 전 우주가 11일간 멈추니 신도 눈을 감을 거야!’ 축제 동안 금기를 어기고 질서와 위계를 뒤집는 의식을 치렀다. 양반 탈을 씌우고 조롱하며 웃음을 터트리던 한국의 풍습과 흡사했다. 유럽인은 탈 대신 마스크를 썼는데 금기 파괴에 관해서 보다 적극적이었다. ‘어겨도 되는 날’이 아니라 ‘어기며 노는 날’로서 축제를 즐겼으니까. 유럽인의 새봄 맞이 축제는 기독교로 흡수되면서 금욕 기간(통상 부활절 40여일 전부터 시작)에 들기 전 미리 마시고 노는 카니발로 이름을 바꿨다. 유럽인의 아메리카 침략과 함께 카니발도 대서양을 건넜다.
남아메리카를 여행하는 동안 두 차례 카니발을 경험했다. 한 번은 인구 4천명에 불과한 볼리비아의 사마이파타에서, 한번은 인구 6백만 명이 넘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두 도시의 인구 격차는 천 배가 넘지만 카니발을 즐기는 사람들의 열정은 엇비슷했다. 인구 4천명이 사는 산골 마을 카니발 퍼레이드가 인구 20만~30만 명이 사는 한국의 도시 축제 퍼레이드보다 길고 화려했다. 한국에선 ‘○○축제’가 열려도 아이들은 놀지 않고 학교에 가고 어른들도 놀지 않고 직장에 간다. 볼리비아에선 공동체가 함께 퍼레이드를 준비하고 함께 축제를 즐겼다. 닷새간의 카니발 동안 아이들은 색색 물감 넣은 물총을 쏘고 어른들은 마당과 광장에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낮술을 마셔댔다. 성직자든, 교육자든, 법관이든, 행정가든 누구라도 불러들여 술을 권하고 춤을 췄다. 일상의 질서가 해체되고 모두가 평등한, 해방의 날이었다. 물총을 맞아 얼굴과 옷이 물감 범벅이 된 성당 신부 후안은 무거운 엉덩이를 흔들며 아시아에서 온 방랑자의 손을 당겼다. “로! 바차타를 가르쳐 줄게, 손목이랑 허리를 잡고 이렇게 스텝을 밟는 거야. 하나, 둘, 셋, 넷!”
볼리비아 산골 마을 사마이파타에서 카니발을 즐기는 주민들. 노동효 제공
마당에서 술안주를 만드는 사마이파타 주민들. 노동효 제공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삼바 카니발을 즐기기 위해 6개월 전부터 준비했다. 매해 2월 말~3월 초 열리는 삼바 카니발 퍼레이드(삼바스쿨의 순위를 가리는 경연대회)는 삼바드로메라는 경연장에서 열린다. 티켓부터 사야지! 7만명 넘게 수용하지만 좋은 자리를 구하긴 쉽지 않다. 티켓 구매사이트가 오픈하자마자 접속했다. 좌석을 클릭할 때마다 ‘판매되었음’ 메시지가 연달아 떴다. 이러다 놓치는 게 아닐까? 마음이 조급해졌다. 리우의 삼바스쿨은 100개가 넘고 5부 리그로 나뉜다. 경연장에선 이틀간 2부 리그 경연에 이어 이틀간 1부 리그 경연이 펼쳐진다. 첫날과 마지막 날을 골랐다. 1부 리그 가격이 4~5배가량 비쌌다. 그다음엔 숙소. 지구 곳곳에서 수십만 인파가 몰려들기에 서둘러 예약하지 않으면 마땅한 숙소를 구하기도 어렵고 숙박비를 몇 배나 더 지불해야 한다. 일단 일주일간 묵을 숙소부터 예약했다. 그 후 일정은 가서 보자고!
6개월을 기다린 후 브라질 리우로 갔다. 삼바드로메 경연장도, 리우의 거리도 열정과 일탈과 환희의 도가니였다. 내 생애 이런 광경을 본 적이, 딱 한 번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폴란드전 승리를 시작으로 시내버스 위에 청년들이 올라가 깃발을 흔들고, 택시기사들은 응원 박자에 맞춰 경적을 울리고, 장례식장과 병원에서 만세 소리 터져 나오고, 사찰과 교회에서 붉은 악마 구호가 울려 퍼지고, 비키니 입은 채 바이크를 몰고, 수많은 시민이 페이스 페인팅을 한 채 지하철을 타고, 지하철 역사 지붕 위에서 점핑하고, 대낮부터 웃통 벗은 채 광장에서 맥주를 들이켜며 일상의 질서와 금기를 벗어던진 채 보냈던 그때. 칼국숫집에서 2002명에게 무료 음식을 제공하고, 얼굴 모르던 아파트 주민끼리 놀이터에서 축배를 들고 정치이념, 종교, 지지 정당이 달라도 함께 환호하고 노래하고 춤추던 나날. 진정 축제였다!
삼바 퍼레이드 경연은 나흘, 카니발은 공식적으론 닷새 정도지만, 축제 분위기는 보름 이상 지속한다. 그 기간 내내 한일 월드컵이 열리던 광장과 거리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개성 가득한 분장과 복장을 하고 대로를 휘젓고 다녔고, 북 치는 행렬을 따라다니며 고성을 지르고 춤을 췄다. 삼바드로메 경연장의 퍼레이드는 밤 10시부터 아침 6시까지, 각 삼바스쿨의 인원은 3천~4천명, 각 삼바스쿨 당 공연 시간은 70분 내외, 주어진 주제(역사, 생태, 인물 등) 중 하나를 골라 음악을 만들고 일 년간 준비한 퍼레이드를 펼쳤다.
각 삼바스쿨 당 소요되는 비용만 수십억. 거대한 독수리 모형이 살아있는 듯 날갯짓하고, 초대형 물고기 조형물이 물방울을 터트리고, 알라딘이 탄 양탄자가 공중부양하더니 경연장 위를 날아다녔다. ‘호버보드’(공중부양 보드)로 나는 양탄자를 만들 줄이야! 최첨단 기술과 인간의 창의력이 융합된 극치의 스펙터클이었다. 마치 역대 올림픽과 월드컵 개·폐막식을 한꺼번에 관람하는 것 같았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퍼레이드란 게 이런 거구나! 마지막 삼바스쿨 퍼레이드 행렬이 지나고 불꽃놀이를 끝으로 경연이 막을 내렸다. 나는 경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인파와 함께 출구를 향해 걸었다. 먼동이 트고 있었다. 그 순간 온갖 복잡한 감정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이유는 모르겠다, 갑작스레 눈물이 터지더니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때의 감정을 글로써 표현할 재주가 없다. 단 하나, 느낌표가 붙은 한 단어만이 불꽃처럼 떠올랐다. 인류!
삼바 카니발이 열릴 때 리우의 거리 풍경. 노동효 제공
축제의 이름들만 다를 뿐 인류는 오랜 세월 대지의 길을 따라 풍습을 주고받았다. 한 해를 10개월로 계산했던 켈트족은 동지 무렵 ‘귀신의 해코지’를 피하려 가면을 쓰고 속을 파낸 순무에 ‘등불’을 켜고 밤새 돌아다녔다. 이 행사는 12개월을 쓰는 기독교로 흡수되면서 10월 31일에 열리는 핼러윈이 되었다. 이란에선 변장한 아이들이 이웃집 앞에서 접시를 두드려 견과류를 받았다. 아제르바이잔에선 아이들이 이웃집 문을 두드린 후 바구니를 문 앞에 두고 숨어서 사탕을 기다렸다. 팥죽을 뿌리고 밤새 등불을 켜던 이들의 후손도 인류 공통의 기억을 쫓아 핼러윈을 즐긴다. 10여 년 전 핼러윈을 즐기기 위한 청춘들의 최고 집결지는 서울 홍대 앞이었다. 클럽 데이와 핼러윈이 겹치는 날 홍대 앞은 인산인해였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핼러윈 집결지는 이태원의 비좁고 가파른 골목으로 졸아들었다. 청년들이 인터뷰에서 말했다.
“마치 외국에 온 것 같아요. 자유분방하고 너무 좋아요.”
“한국에서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여기밖에 없어요.”
2002년 한국에선 ‘기존의 질서와 위계를 벗어던지고 일탈과 난장과 환희로 가득한 축제’가 좁은 골목을 벗어나 광장과 대로에서 펼쳐지던 때가 있었다. 21년 전이니 제트(Z)세대(199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태어난 세대)는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셈이다. 지구 곳곳에서 인류는 그런 축제를 일 년에 한 번은 체험한다. “굳이 그런 축제를 즐겨야 하냐”고 묻는 이에게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중 삼중창 ‘벨’(Belle)의 가사가 답이 될 것이다. 성당 앞 광장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집시 에스메랄다는 자유와 예술이 집약되어 인격화한 ‘축제의 화신’, 그를 향해 성직자와 근위대장과 종지기가 함께 노래했더랬다.
“아름다움, 이 말은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말일 거야. 그녀가 춤출 때면 새가 날아오르려고 날개를 펴는 것 같아. 그녀의 치맛자락에 붙들린 내 눈길, 기도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누가 먼저 그녀에게 돌을 던지려는가? 그런 자는 이 땅에 살아있을 자격도 없는 자.”
곧 새봄이 오고 꽃이 만발하리라.
노동효 여행작가
화성으로 떠나기 전 인류 삶과 지구 풍경을 톺아보기 위해 여행하는 ‘길 위의 노동자'. <남미 히피 로드>, <세계배낭여행자들의 안식처, 빠이>, <푸른 영혼일 때 떠나라>, <로드 페로몬에 홀리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