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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살이 20년이 넘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이제는 고향보다 이곳이 더 익숙하지만 유독 적응이 안 되는 것이 있다. 봄이 더디게 온다는 점이다. 내 고향은 통영은 제주만큼 봄이 이르게 닿는 곳이라 서울에서 봄소식을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한 것이리라.
통영에서의 봄은 2월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부터 시작한다. 겨울에 핀 붉은 동백꽃이 후두둑 떨어지고 나면 다채로운 꽃들과 함께 봄은 본격적으로 피어난다. 2월 말에 매화의 맑은 향이 스치듯 지나가면 일단 발걸음을 멈춘다. 숨을 한껏 크게 깊이 들이마셔 겨우내 묵은 호흡을 매화 향으로 씻어낸다. 어린 시절 살던 아파트 입구 가로수가 매화나무였던 덕분에 누렸던 호사다.
3월 개학과 함께 개나리와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트리고 3월 말이면 통영 도처에 있는 벚꽃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모두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이들이라 나의 봄 학기 스케치북에는 연두와 초록보다 연분홍과 노랑부터 칠해졌다. 여담으로 3월 중순과 말 사이에 통영을 방문하게 된다면 충렬사 입구를 지나 바로 앞에 서 있는 400년 수령 동백나무의 낙화를 만나길 바란다. 붉은 꽃송이들이 흩떨어진 모습에서 처연한 아름다움을 읽을 수 있다. 통영 출신 시인 유치환은 시 ‘동백꽃’에서 ‘다시도 다시도 아까울 리 없는 아 아 나의 청춘의 이 피꽃’이라고 표현했는데, 분연한 심상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리고 박경리기념관에 들러 박경리 선생님 묘소 앞 벤치에 앉아 벚꽃 군락을 감상하기를 바란다. 박경리 선생님의 따뜻한 글밥과 벚꽃의 보얀 꽃밥이 허기진 마음을 든든하게 채워준다.
내 유전자에 새겨진 봄은 서울의 봄보다 일러 꽃이 없는 3월은 괜스레 조바심이 난다. 나의 모든 감각은 봄을 더듬고 있는데 여전히 잡히지 않는 봄을 채워줄 것을 찾다 보니 역시 공예품만 한 게 없다. 옷은 나보다 남이 더 많이 보게 되고 꽃꽂이를 해도 길어야 일주일이다. 살림 도구는 온전히 내가 즐기고 만끽할 수 있어 봄이 담긴 공예품 살림살이로 나만의 봄맞이를 제안한다. 특히 식탁 위 그릇을 봄의 정원처럼 화사하게 바꿔주면 봄을 기다리는 초조한 마음이 한결 느긋해진다.
먼저 옻칠공예가 박수이 작가의 꽃볼은 우리 집 매화 역할을 톡톡히 한다.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매화처럼 꽃샘추위로 밖은 아직 겨울이지만 옻칠 꽃볼에 디저트를 담으면 눈앞은 벌써 봄이다. 박수이 작가는 전통 옻칠 방식에 본인만의 다양한 색을 더해 현대적인 아름다움과 쓰임을 빚어낸다. 삼베와 옻칠로 꽃잎 모양 그릇을 만들고 생옻칠에 직접 만든 여러 안료를 섞어 완성한 다채로운 색으로 마무리한다. 옻칠만의 고유한 미감은 물론 가볍고 단단하며 조각 같은 조형미까지 갖췄다. 천연 옻으로 만든 그릇은 뜨거운 음식을 담아도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어 활용도가 높은 점도 마음에 쏙 든다.
심보근 작가의 무자기 꽃 시리즈. 심보근 제공
이꽃담 작가의 진달래 접시와 야생화 머그. 이꽃담 제공
도자기에 들꽃과 야생화를 피워내는 이꽃담 작가의 그릇도 봄을 기다리는 몽상가의 동반자로 제격이다. 작가의 이름 그대로 작품에 꽃을 담는다. 작가는 작업실 주변에 무심하게 그렇지만 치열하게 피어난 야생화에 특히 관심을 기울인 듯하다. 압화기법을 활용해 꽃의 모습을 자연 그대로 옮기고 미세한 입자의 색을 스미듯 입힌다. 음식을 담기도 하지만 벽에 걸어 집 안에 봄의 생기를 전하기에 그만이다.
식탁 위에 벚꽃처럼 하얀 꽃들이 만발하는 연출은 심보근 작가가 만든 도자기 브랜드 ‘무자기’의 꽃 시리즈 그릇으로 가능하다. 일부러 꾸미거나 더하지 않는 의미의 단어 ‘무작위’에서 따온 이름답게 하얗고 깨끗하고 실용적인 그릇을 만들던 작가는 영화 <월플라워>를 보고 영감을 받아 꽃 시리즈를 만들었고 무자기를 대표하는 시리즈가 되었다. 꽃 시리즈의 첫 작품의 꽃잎 수는 19개와 29개로 청춘을 상징한다는 점도 재밌다. 청춘들이 가장 고민에 빠지는 나이와 완전하지 못한 숫자라는 뜻을 담았다.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접시, 찬기, 면기, 종지 등으로 구성되어 꽃 시리즈만으로도 푸짐한 상을 차릴 수 있을 정도다. 하얀 도자기 같은 작품 위에 김치, 간장, 나물 등 그 무엇을 담아도 화사한 꽃차림이 된다.
김보람 작가의 뵤량 누비꽃 바구니. 김보람 제공
식탁을 벗어나 집안 곳곳에 꽃의 자리를 마련하며 봄을 기다리는 방법도 있다. 이 꽃은 지거나 시들지 않고 애써 돌보지 않아도 되는, 공예가가 바느질로 짓고 피운 꽃이다. 전통 누비 기법으로 목련과 연꽃을 닮은 바구니를 만든 ‘뵤량’의 김보람 작가 덕분에 살림이 한결 봄에 가까워진다. 우아하게 펼쳐지는 꽃잎과 정성스러운 결은 원단과 원단 사이에 솜을 넣고 그 위에 재봉틀로 촘촘하게 선을 잇는 누빔 작업으로 완성한다. 크기가 다른 바구니를 겹쳐 두면 더 활짝 피어난 꽃처럼 보이며, 봄맞이 선물로도 근사하다.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봄 전령사는 최은정 자수 작가가 실크와 오간자, 비즈로 피워낸 꽃이다. 생명을 빚는 경이로운 자연에 감탄하며 자연에 바치듯 손으로 피운 꽃이다. 새해 선물로 받아 화병에 꽂아두었더니 두 송이만으로도 공간이 환해졌다. 요즘은 테이블 위에 올려 차를 마실 때 꽃잎부터 비즈 꽃술까지 찬찬히 들여다보고 만져보며 부드러운 봄의 감촉을 대신한다.
공예는 자연에 순응하며 빚어낸 일상 예술이다. 공예가들이 자연을 스승 삼아 생명을 틔워낸 꽃 같은 공예품 덕분에 일찍 봄을 들이고, 깊게 완상하며 나는 꽃바람이 단단히 들었다.
박효성 리빙 칼럼니스트
잡지를 만들다가 공예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우리 공예가 가깝게 쓰이고 아름다운 일상으로 가꿔주길 바라고 욕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