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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12일 일요일, 영국 랭커셔주의 소도시 애크링턴. 52년 39일 동안 매일 1마일(약 1.6㎞) 달리기를 쉬지 않은 론 힐(1938~2021)은 그날도 달리기에 나섰다. 그런데 그날은 평소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최저 기온 1도, 최고 기온 8도에 종일 습도가 80% 언저리를 오르내려 날씨가 축축하고 차가웠던 일요일, 당시 78살이던 힐은 달리기 400m 지점에서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 자동차 사고를 당해 갈비뼈를 치료하거나, 달리기 선수 생활을 하며 엄지발가락 근막 수술을 받아 석고붕대를 고정하고서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다. 하지만 달리기를 마치고 나서 정말 이러다 죽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큰 통증을 겪고 나선 가족들을 위해 52년 넘게 지속한 매일 달리기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상 두 번째로 마라톤 2시간 10분 기록을 돌파한 마라토너이자 장거리 달리기 선수로 도쿄(1964), 뮌헨 올림픽(1972)에 영국 국가대표로 출전했던 론 힐이 매일 달리기를 시작한 건 1964년 12월 20일이었다. 힐은 그해 가을 열린 올림픽에 1만m 종목과 마라톤 대표 선수로 출전했고, 각 종목에서 18, 19위로 부진한 성적을 내고 말았다. 그는 같은 해 25㎞ 달리기에서 자신의 첫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전설적인 러너 에밀 자토펙의 기록을 1분 단축했고, 또 다른 하프 마라톤 대회에서는 지금까지도 깨어지지 않은 신기록과 함께 우승을 거뒀다. 하지만 올림픽에서만은 어찌 된 영문인지 기록이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론 힐의 매일 달리기가 왜 시작됐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던 26살의 론 힐이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매고 혼자 달리기에 나서는 모습을 한 번쯤 상상해볼 수는 있다. 달리기를 직업으로 삼고 있던 힐이 누구에게도 요청받지 않은 달리기를 시작한 것은 그저 자신과의 하나의 약속을 맺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이 약속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든 매일 한 번은 지켰다. 자정에 가까운 시각 동료 선수와 함께 경기장 인근의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나서든, 도쿄 올림픽으로 향하는 장거리 비행기가 잠시 파키스탄 카라치 공항에 멈추는 동안 뜨겁게 달아오른 활주로에 나가서든, 동료들과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며 맥주에 얼큰하게 취한 채 집까지 달려가는 길이든, 론 힐은 어떻게든 매일 달리기를 이어갔다. 1993년에는 엄지발가락 근막염 수술을 한 뒤 발에 석고붕대를 한 채 지팡이를 짚고 트랙을 돌았는데, 몇몇 달리기 순수주의자들은 그가 지팡이를 짚은 순간 매일 달리기가 끝났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50년 이상 매일 쉬지 않고 달린 영국의 장거리 달리기 선수 출신 론 힐. 위키미디어코먼스
‘국제 매일 달리기 협회’(Streak Runners International)는 실제로 존재하고 활동 중인 협회로, 다음과 같은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우리는 기상 조건, 부상, 질병, 인생의 경조사를 뚫고 매일 달립니다.” 1마일(약 1.6㎞)을 ‘매일 달리기’의 최소 거리로 규정하는 이 협회는 2000년 8월 7일 미국 매릴랜드주에서 설립됐다. 매일 달리는 사람이라면 전 세계 누구나 가입할 수 있다. 단, 협회 웹사이트와 소식지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최소한 1년 이상 매일 달리기를 한 뒤에 허용된다. 현재 전 세계의 회원 4200여명이 매일 달리기를 이어가고 있고, 2천여명의 회원은 매일 달리기에서 ‘은퇴’를 선언한 기록을 남겨두었다. 협회 웹사이트에는 전 세계 회원들의 기록을 살펴볼 수 있는 페이지가 있는데, 지금까지 가장 오래 매일 달리고 있는 남성 회원은 매일 달리기 53년째를 넘긴 존 서덜랜드, 여성 회원은 42년째를 넘긴 로이스 바스티엔이다. 협회에서는 매일 달리기를 한 기간별로 회원을 분류하고 있기도 한데, 그중 가장 경력이 짧은 1년 이상 5년 미만을 ‘초심자’로 분류한다. 가장 경력이 긴 ‘언덕에 오른 자’에는 50년 이상 매일 달리기 중인 회원들이 속한다.
국제 매일 달리기 협회는 그 이름에 걸맞게 매일 달리는 사람들의 기록을 정기적으로 공유하는 소식지를 발행한다. 마치 태권도 승급 심사 결과를 알리듯 5년 단위로 구분된 회원 분류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사람들을 공지하고, 매일 달리기에서 중요한 성과를 거둔 회원들을 인터뷰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전 세계의 회원들이 보내온 매일 달리기 소식란이다. 소식란에는 오로지 두 가지 종류의 소식만 존재한다. 매일 달리기를 며칠 혹은 몇 년째를 달성했다는 소식이거나, 며칠째에 매일 달리기를 멈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소식에서든 변함없이 보이는 것이 한 가지 있다. 협회 소식지에 소식을 알리는 이들은 지금 이 순간 달리기를 계속하고 있는지 잠시 멈추었는지와 상관없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달릴 거라는 의지를 드러낸다.
1만932일 동안 숨 쉬듯 매일 달린 론 힐의 이야기나 국제 매일 달리기 협회 회원들의 소식지를 생각하면, 이제 갓 1000일을 넘긴 나의 매일 달리기를 돌아보게 된다. 이제 갓 3개월이 되어가는 아이의 양육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요즘, 예전처럼 하루에 1~2시간을 달리기에 쓰는 건 아무래도 쉽지 않은 탓이다. 지난 3년간 어디서 어떻게든 달리기를 계속해왔지만, 육아를 시작하면서는 ‘제대로’ 달리는 날이 줄어들었다 생각하며 새삼 아쉬움이 큰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은 이렇다. 전 세계의 매일 달리기 협회 회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어쩌다 보니 매일 달리는 사람이 되었다.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달리기는 어느새 매일 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퇴근길에 가방을 질끈 메고서 집까지 달리든, 아이를 재운 뒤 화장실 앞에 매트를 깔고 제자리에서 뛰든, 예전처럼 러닝복을 갖춰 입고 몇 ㎞를 뛰든, ‘제대로 된’ 달리기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정말 중요한 건 달리기와 어떻게 함께, 꾸준히 살아갈 것인지다.
박재용 프리랜스 통번역가·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