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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와인을 어쩌다 가끔 마신다. 촌스럽게도 상당수의 레드 와인을 마시면 독주처럼 목에 탁 걸린다. 진한 향보다 비강을 자극하는 날카로움이 느껴진다.
그래서 이 날카로움을 피하는 방향으로 레드 와인을 고른다. 포도 껍질과 씨앗이 가진 타닌이 날카로움의 원인 가운데 하나다. 타닌은 와인의 숙성과 맛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지만 강한 산도와 함께 피하고 싶은 요소다. 그렇지만 타닌과 산도가 없이 마냥 단 레드와인은 꺼린다. 포도에 소주와 설탕을 넣어 만드는 옛날식 담금주의 맛을 떠올리게 하는 탓이다.
그러다 보니 마실 수 있는 레드의 폭은 좁다.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카베르네 소비뇽과 산지오베제는 늘 조심스럽다. 이 둘의 날카로운 향과 단단한 구조감이 다소 벅차다. 하지만 카베르네 소비뇽은 전 세계에서, 산지오베제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품종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약간은 비주류인 레드 와인을 선호한다.
내가 즐기는 레드 와인은 메를로, 네렐로 마스칼레제, 말벡, 쉬라 등이다. 그중에 메를로를 선호한다. 농밀하고 우아한 향이 있으면서도 목 넘김이 부드럽다. 병을 딴 후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산지오베제에 견줘 편하게 마실 수 있다. 귀족적인 프랑스의 메를로도 좋지만 다양한 변주가 있는 이탈리아 메를로를 좋아한다.
내가 마시는 대중적인 이탈리아 메를로 와인은 레 볼테와 그란 파시오네다. 슈퍼 투스칸 와인으로 유명한 와이너리 ‘테누타 델 오르넬라이아’의 세컨드 브랜드인 레 볼테는 토스카나를 대표하는 품종인 산지오베제 대신 프랑스 품종인 메를로를 70% 블렌딩했다. 산지오베제의 비중은 15%다(나머지 15%는 카베르네 소비뇽). 이탈리아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주객이 바뀐 파격이다. 메를로의 베리, 꽃, 후추 같은 복합적인 향과 맛,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산지오베제와 카베르네 소비뇽의 구조감을 느낄 수 있는 와인이다. 가격도 합리적이다.
베네토 지방의 그란 파시오네 로쏘도 비슷하다. 2만 원대의 이 와인은 아마로네와 맛이 비슷하다. 아마로네는 베네토의 대표적인 포도 품종인 코르비나 등을 대나무나 밀짚 등에서 말려 당도를 끌어올린 뒤 와인을 빚는 아파시아멘토 기법을 사용한다. 아마로네는 토스카나 와인만큼 국내에서 인기가 있지만 꽤 고가다. 그런데 이 와인은 아파시아멘토 대신 코르비나에 60%의 점토질에서 자란 메를로를 섞는 양조기법을 택했다. 경쾌한 보디감과 짙은 베리와 바닐라 같은 향신료의 맛은 부드러운 레드를 선호하는 나에게 꼭 맞는 와인이다.
두 와인을 이탈리아 와인 강연을 할 때마다 들고 간다. 대부분 강연의 와인 구매 예산이 빠듯한 탓도 있다. 그렇지만 시음 뒤에 반응은 꽤 좋다. 이어 가격을 귀띔하면 참여자의 반응은 더 뜨겁다. 그만큼 두 와인의 가성비는 뛰어나다. 두 이탈리아 와인의 가성비 비결은 산지오베제나 코르비나를 일정 비율 이상 쓰는 기존 전통 방식이 아니라 외래 품종인 메를로를 사용한 파격에 있다. 그 파격이 레드와인을 가리는 나에게는 참 반가운 일이다.
글·사진 권은중 음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