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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브레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전이었다. 노랗게 물든 은사시나무 아래 갓 베어낸 건초더미가 높이 쌓여가고, 공기 중에는 신선한 풀향기가 떠돌았다. 저녁밥을 짓기 위해 지핀 난로의 연기가 서녘 하늘로 번져가는 시간이 되면 들판은 고요한 분주함으로 술렁였다. 해가 이우는 시간에 들판에 서서 귀를 모으면 온갖 소리의 향연이었다. 풀을 뜯는 소들의 워낭소리, 건초를 가득 싣고 가는 마차의 말발굽 소리, 염소의 귀갓길을 재촉하는 소년의 여린 목소리, 긴 가래로 건초를 긁어모으는 소리, 집으로 돌아가는 트랙터가 털털거리는 소리, 양들을 쫓는 개들이 컹컹거리는 소리.
저무는 빛 아래 들녘에서 일하는 사람의 등에는 어떤 신성함이 깃들어 있었다. 소년이, 여인이, 나이 든 남자가 건초를 쌓아 올릴 때면 나는 그들을 대신해 두 손을 모으고 싶어졌다. 자꾸자꾸 높아지는 건초더미에 기댄 사람과 짐승의 겨울이 부디 따스하기를 빌고 싶어졌다. 가을의 대지에, 어떤 절대적 존재에게 무릎 꿇고 싶었다. 헛된 욕심도 없이 그저 몸을 써서 일하며 살아온 이들을 위해, 이 아름다운 계절을 누리지 못하고 서둘러 떠난 세상의 모든 생명을 위해 두 손을 모으고 싶었다.
들녘에서 건초를 벤 뒤 집으로 돌아가는 가족. 김남희 제공
가을날 루마니아 북부의 마을을 지나가는 여행자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10월에 이곳을 지난다는 건 비현실적인 풍경 안에 잠시 머무는 일이기에. 눈앞의 풍경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종종 조급한 마음이 되고는 했다. 한숨을 내쉬며 말을 잃고, 가던 길을 멈추고 하염없이 바라보고는 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들녘에서 겨울을 준비하던 이들이 일요일이 되면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고 교회로 향했다. 무릎까지 오는 꽃무늬 치마에 자수를 놓은 조끼를 입은 여자와 깨끗한 셔츠 위에 양털 잠바를 입은 남자가 손을 잡고 걸어갔다. 바람이 쌀쌀한 날에도 그들은 교회 마당에 선 채로 두 시간의 예배를 드렸다. 시린 하늘로 번져가는 여리고 고운 목소리에 신을 찬양하는 마음이 실렸다. 그 모든 풍경이 낯설고 아름다웠다.
풍경보다 더 아름다운 건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루마니아의 북부 마라무레슈로 올라오니 사람들의 다정함이 더 깊어졌다. 한 번의 여행을 마친 후에 한 사람이 남는 여행이 내게는 늘 최고의 여행이었다. 오래 이어가고픈 인연 안드레아를 만난 곳도 그곳이었다. 넓은 정원 주변으로 몇 채의 목조주택이 자리한 숙소에서 안드레아는 맞은편 집에 든 손님이었다. 그는 유엔(UN) 소속 엔지니어로 우크라이나에서 일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묻는 내게 그가 심각한 얼굴로 답했다. “안 좋아.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우리만 해도 지난주에 세 번이나 지하 벙커로 피신해야 했어. 그래도 어떻게든 삶은 이어지고 있어.” 그가 우크라이나에서 들고 온 양귀비씨가 뿌려진 케이크와 자작나무 수액, 우크라이나 와인이 그날 우리의 아침 식사가 되었다. 안드레아는 사촌 일디와 함께 우리 숙소의 주인이 주최하는 일주일간의 도예 수업에 참여하기 위해 머물고 있었다. 집주인 부부는 도예가 다니엘과 아내 다나. 다니엘의 아버지는 이곳에서 나고 자란 화가이고, 다니엘은 루마니아에서 이름이 꽤 알려진 도예가여서 그들은 이 지역 예술가들과 친밀했다. 덕분에 다니엘이 여는 도예 수업은 동네의 솜씨 좋은 할머니와 함께하는 빵 만들기, 동네 가수와 함께하는 미니 콘서트, 동네 산악인과 함께 하는 버섯 찾기 트레킹 등 재미난 활동이 더해진다. 안드레아 덕분에 우리도 다나, 다니엘과 점심을 같이하고, 그들이 사서 복원한 옛 목조주택을 둘러봤다.
산에 둘러싸인 루마니아 북부는 흥미로운 문화가 가득했다. 하루는 안드레아가 양털 재킷을 주문하러 가자며 나섰다. 이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양을 친다. 해마다 양털을 깎고 남은 털은 동네의 베 짜는 할머니들 차지. 공짜로 양털을 얻어오면 그걸로 일일이 실을 잣고, 그 실로 담요나 카펫, 옷을 짠다. 대부분 자신이 쓸 용도로 짜지만 때로는 주변에 팔기도 한다. 수백 년 이어온 방식 그대로 양털 잠바를 짜는 모습도 놀라웠지만 그 집의 경이로움은 따로 있었다. 거실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인 세 개의 나무함이었다. 200년 넘은 나무 상자 안에는 이 할머니의 할머니가 결혼 전에 손수 만든 수예품들과 옷가지들, 또 다른 나무함에는 할머니의 어머니 혼수품이 가득 들어있다. 당연히 마지막 나무함에는 할머니 당신이 만든 것들이 들어 있다. 전날 80살이 되었다는 할머니의 생일 케이크를 나눠 먹고 돌아오는 길에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안드레아에게 물었다. “하나 짜는 데 2주 걸리는 그 양털 잠바, 도대체 가격이 얼마야?” “나도 몰라. 안 물어보고 주문했어. 할머니가 적절한 가격을 부르실 거라고 믿어.” 그의 말대로 할머니가 욕심을 부릴 것 같지는 않았다.
우크라이나에서 일하는 루마니아인 안드레아. 김남희 제공
80살 할머니가 자신의 할머니가 만든 자수 제품을 보여주고 있다. 김남희 제공
마라무레슈 지역에는 오래된 목조 교회들이 남아있다. 1717년 타타르의 침입 이후 지어진 교회들은 헝가리가 석조 교회 건축을 금지한 탓에 나무로 지어졌다. 뾰족하게 솟은 목조 교회들은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했다. 대중교통으로는 돌아보기 힘든 교회들을 안드레아의 차를 타고 다니며 편히 볼 수 있었다. 안드레아와 헤어질 때 그에게 말했다. “어떻게 고마움을 표해야 할지 모르겠어. 네 덕분에 너무나 좋은 시간을 보냈어.” 그가 쿨하게 답했다. “나도 여행을 좋아해서 늘 혼자 다녀서 잘 알아. 이건 다 네 카르마 덕분에 일어나는 일이고, 너는 또 누군가에게 다른 방식으로 뭔가를 되돌려줄 거라는 걸.”
마라무레슈에서 동쪽으로 더 가면 몰다비아(몰도바). 이번에는 오래된 프레스코화들이 남아 있는 교회를 찾아 떠났다. 단순하고 소박한 프레스코화들도 매력적이었지만, 역시나 사람들이 더 마음을 끌었다. 안젤리카와 시미온은 소 치고 양 키우며 농가 민박을 운영하는 부부였다. 열일곱 마리 돼지, 네 마리의 양, 소 세 마리, 양치기 개 한 마리, 길고양이 아홉 마리가 식구였다. 이 집 소들의 이름은 꽃을 뜻하는 플로리카와 작은 별을 뜻하는 스텔루타. 송아지 한 마리도 있는데 암소가 아니라서 올해 초쯤이면 세상을 떠날 운명. 주문한 저녁 식사는 부부와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메뉴는 집에서 키운 채소 비트와 양파, 감자와 파프리카를 듬뿍 넣어 만든 채소 수프. 부부가 숲에서 채취한 포르치니 버섯으로 만든 크림 스튜에 옥수숫가루 폴렌타 죽. 디저트는 시고조할머니의 레시피로 만든 푸딩에 남편이 양봉해서 만든 꿀과 집의 소 밀크로 만든 크림을 끼얹었다. 음식마다 신선한 재료의 맛이 살아 있었다. 식탐 많은 나는 자제심을 잃고 흥분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철마다 온갖 술을 담갔다. 남편 시미온 역시 취미가 와인 만들기. 그가 만든 하우스 와인은 투박하지만, 향이 짙고 묵직했다. 우리는 연신 “노록”(행운을 빌어요)을 외치며 건배했다. 평균 도수 40도라는 식전주 수이카(자두 증류주)에 와인까지, 이 동네 식탁에는 술이 필수였다.
세 채의 목조주택에는 두 사람의 정성 어린 손길이 깃들어 있고, 모든 물건마다 사연이 담겨 있었다. 우리가 잔 집은 카사 돔니카. 돔니카라는 여인의 60년 된 집을 사서 해체, 옮겨온 후 다시 재조립해 고쳤다. 방에는 돔니카 씨의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우리 방의 큰 나무함은 결혼할 때 여자들이 혼수품(직접 만든 자수 커튼, 침구류, 전통 옷 등)을 넣어오는 혼수 상자였다. 또 다른 집은 까사 라힐라. 증조시할머니의 이름을 땄고, 방에는 그가 만든 자수 작품이 액자로 걸려 있다. 방 두 개에 욕실로 이루어진 이 집은 방마다 커다란 난로가 있어 장작이 활활 타올라 산간 마을의 추위를 녹여준다. 마지막 집은 시어머니의 이름을 딴 카사 플로레아. 시부모님이 살던 집이었다. 시부모님은 나이가 들자 그 집을 비워두고 외양간 옆의 방 하나와 화장실이 전부인 곳으로 옮겨가 돌아가실 때까지 아주 간소하게 사셨단다. 그 집은 와인을 좋아하던 시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방 안의 모든 물건이 포도 문양. 컵도, 접시도, 커튼도, 테이블보도 전부 포도 열매 아니면 포도잎이다. 방에는 당연히 시어머니가 만든 자수 제품들과 두 분의 사진이 걸려 있다. 안젤리카의 다정한 마음이 방마다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한껏 차려입고 교회로 들어서는 여성들. 김남희 제공
목조 건축이 아름다운 바르사나 수도원. 김남희 제공
작지 않은 이 민박집의 모든 청소와 다림질, 요리를 안젤리카 혼자 해낸다. 가축들 여물을 주고, 마당의 잡초를 뽑고, 손님 방에 장작을 때고 하는 일은 남편 시미온의 몫. 저녁 식사를 할 때 남편이 아내를 도와 그릇을 옮기거나 서빙을 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이 집의 모든 침구류가 흰색인데 빳빳하고 뽀송뽀송한 상태였다. 그걸 혼자서 빨고, 다리고, 씌운다니…. 상상만으로 나는 고개가 절레절레. 하루에 도대체 몇 시간 일하냐고 물으니 안젤리카는 “24시간”이라고 답하며 웃는다. 그런데도 일에 찌든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마음을 다해 손님을 대접한다. 키우는 가축을 돌보는 태도도 다정하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지만, 돈이 결코 전부가 아닌 사람의 태도다. 자신이 하는 일이 결국 살아있는 존재를 향한다는 사실을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이의 존엄이 그에게 배어 있었다.
이 산골 마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어쩌면 많은 사람이 꿈꾸는 삶이다. 보람이 있는 노동을 하며, 자연과 격리되지 않은 채, 이웃과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삶. 우리는 점점 그런 삶에서 멀어지고 있다. 산업화가 진행될수록 일도, 삶도 파편화되기 쉽다.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우리는 경제 성장이나 발전을 향한 엔진을 멈추지 않는다. 자연을 누리는 여유도, 타인을 챙기는 마음도 모두 돈이 있어야 가능한 것들로 여기면서 보람도 긍지도 없는 노동을 하며 살아간다. 꿈꾸는 삶은 먼 훗날 미래로만 미뤄둔 채로.
그 집을 떠나던 날, 안젤리카는 마당의 포도와 사과, 직접 구운 케이크와 과자를 가득 담아 건넸다. “우리의 첫 한국인 손님이 되어줘서 정말 기뻤어”라는 말과 함께.
김남희 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