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ESC] 슬램덩크, 그 시절 기억 속의 안 감독님 아닐지라도

등록 2023-02-18 11:00수정 2023-02-19 16:18

그걸 왜 해? 추억의 만화책

영화화한 ‘슬램덩크’서 시작
추억의 ‘H2’, ‘몬스터’ 까지
어릴 적 몰랐던 깨달음 있네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한 장면. NEW 제공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한 장면. NEW 제공

☞한겨레S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세요. 검색창에 ‘에스레터’를 쳐보세요.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고 왔다. 주중 낮 혼자였다. 결점 많은 북산고 농구팀이 강호를 꺾어가며 전국대회 제패를 향해 달려가는 스토리는 스포일러 할 것도 없이 다 아는 이야기. 그런데 극장 안에서 한 편의 영화를 본다는 걸 넘어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내 앞줄에도 나 같이 혼자 영화를 보러 온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앉았는데, 그 사람과 나의 반응의 차이가 그랬다. 영화는 중반을 넘어서 이미 둘 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가고 있던 시점. 그런데, 나와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참는 감동 포인트가 미묘하게 엇박자가 났다. 나는 ‘저 장면은 그 정도는 아닌데’라고 생각하는 장면에서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몸으로 울고 있었고, 반대로 나는 ‘사회적 최면 따위 모르겠고 감동이야’하며 눈물을 주체 못 하는 장면인데, 그는 의외로 무덤덤하게 영화를 보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아저씨 그 장면에서 왜 울었던 거예요?”라고 묻는 만화 같은 일은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고, 돌아오는 길에 그 점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우리는 그 장면에 걸쳐 있는 각자의 시간을 떠올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자율 학습시간에 몰래 숨어서 돌려보던 만화책을 떠올리게 하는 어떤 장면. 그러다 선생님께 걸려서, 책방에서 빌린 거라 꼭 갖다줘야 한다며 사색이 되어 빌었던 장면. 요즘 같은 겨울밤 방구석에서 낄낄거렸던 기억 속의 한 장면. 각 개인이 가진 기억들이 달라서, 추억의 그 장면에 대한 반응이 다른 게 아닐까.

‘슬램덩크’ 작가도 초보였다는 위안

추억에 빠진 김에 기억 속의 만화들 을 최근 다시 보았다. 그런데 또 여기서 신기한 점. 같은 만화에서도 어렸을 때 느꼈던 감동과는 다른 어떤 부분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다.

<터치>와 〈H2〉는 두 작품 모두 아다치 미츠루가 그린, 야구만화의 탈을 쓴 첫사랑에 대한 만화다. 국내 록밴드 델리 스파이스의 <고백>이란 곡의 가사 내용이 만화 〈H2〉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꽤 잘 알려진 사실. 그런데 어느 날 존경하는 광고계 선배가 말했다. 만화 <터치>와 〈H2〉를 보면서 편집에 대해 많이 배웠다고.

만화 〈H2〉의 한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소꿉친구로 자란 히로와 히카리. 어느 날 히로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히카리에게 소개하고, 둘은 사귀게 된다. 시간이 지난 어느 날, 히카리는 깨닫는다. 동생처럼 생각했던 히로가 꽤 괜찮은 남자였음을. 대사가 거의 없는 일련의 장면 뒤로 “중2 때까지 코흘리개 꼬마였어. 겨우 키가 커서 슬슬 여자친구라도 사귀어볼까 싶었을 땐, 괜찮은 애는 모두 첫사랑 진행 중이었지”라는 히로의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만화는 히로의 리틀 야구부 시절부터 사춘기 까지, 긴 시간을 몇 컷에 압축해 대사 없이 담담하게 배치한다. 키가 작았던 히로를 표현하기 위해 중간에 프레임을 작게 잡은 건 작가만의 디테일. 교복을 입은 채 마주 앉은 히로와 히카리는 쑥스러워하고, 연애를 몰라 파르페나 먹고 있는 주인공 히로. 그러다 히카리는 코흘리개 꼬마였던 히로가 달리 보인다는 걸 깨닫는다. 써놓고 보면 이렇게나 재미없는 이야기를 만화책 두 페이지에 압축해놓은 걸 보면, 그림과 그림 사이에 숨어 있는 몇 년의 시간을 상상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영상도, 텍스트도 아닌 오로지 만화책이라는 매체에서만 가능한 장면 배치이지 않을까?

영화에서 생략된 만화책 속의 주옥같은 대사와 명장면들을 기대하며 <슬램덩크> 1권을 다시 꺼내 든 저녁. 배를 깔고 누워 귤 바구니를 끼고 시작한 <슬램덩크>는 내 기억 속의 만화책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캐릭터가 완성되지 않았던 시절의 채치수는 오만하고 폭력적이어서 강백호가 조금만 실수해도 때리고, 팀원들에게 화를 낸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변 사람들을 감싸 안는 캐릭터였던 안경 선배는 내 기억보다 훨씬 더 호전적이어서 1학년과의 연습 시합에서 “치수야 끝장내버려”라고 외치는 좀 재수 없는사람. 그리고 “포기하는 순간 게임 종료예요”라고 말하던 ‘어른’ 안 감독님은 첫등장에 “농구부 감독님인데, 가끔 오셔”라고 묘사됐다. 안 감독님이 소일거리 삼아 가끔 농구부에 들르는 분이라니, 내기억 속 안 감독님은 저런 분이 아닌데. <슬램덩크>는 전설적인 만화였지만 사실 초반엔 미완성의 캐릭터, 연재 종료를 막기 위해 불량 서클과의 뜬금없는 싸움 에피소드를 넣는 작가의 좌충우돌로 이어져 왔다. 그래서 시간의 흐름을 따라읽다 보면 ‘만화의 신’ 타케이코 이노우에도 시작은 강백호처럼 초보에 가까웠다는 걸 알게 된다. 거기서 조금 더 깊이 작가의 입장에 감정이입 해보면 왜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인공이 강백호가 아닌 송태섭인가에 대한 답을 유추해낼 수 있을지도.

혹시 작가는 앞뒤 없이 갑자기 등장해서, 다른 주인공들처럼 아껴주지 못했던 송태섭에게 미안했던 것은 아닐까? 아무튼 20년 만에 <슬램덩크> 만화책을 다시 읽으려면 초반 2권 정도까지는좀 참아가면서 인내해야 한다. 하지만 그뒤에 어떤 이야기들이 펼쳐질지 우리 모두 안다. 좌충우돌하던 작가의 고민 끝에 누군가의 청소년 시절을 책임졌던 장대한 서사시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만화책 속에서 찾은 깨달음

어른이 되어 보아도 감동과 재미가 있는 만화책들도 있다. <몬스터>와 <20세기 소년>(우라사와 나오키)은 다시봐도 치밀한 구성이 매력적이었고, 숲에 버려진 피아노와 유흥가에서 태어난 카이의 성장기를 그린 <피아노의숲>(잇시키 마코토)는 다시 보다 진짜 울고 말았다. <강철의 연금술사>로 유

명한 작가 아라카와 히로무가 농업 고등학교 학생들의 이야기를 그린 <은수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꼭 추천하고 싶다.

<우주형제>(코야마 츄야)는 대사가 참 아름답고도 웃겨서, 카피라이터 시절 슬럼프를 겪었을 때 힘이 되어주었다. 지금도 여전히 연재 중이다. <테르마이 로마이>(야마자키 마리)는 로마의 목욕탕 건축가가 뜬금없이 시간여행을 해서 현대 문물을 경험하는 이야기다. 웃다 죽을 수 있다.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호리코시 코헤이)는 소년 만화 특유의 감동, 호쾌함, 성장, 유머가 들어 있다.

원래는 더 잘 쓰고 싶었던 이 원고를 쓰고 다시 써도 자꾸 실패하다 <꼭두각시 서커스>(후지타 카즈히로)의 마지막 페이지에 쓰여 있던 작가의 말이 생각났다. “긴 꿈을 꾸고 있었던 기분이 듭니다.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고 쥐어뜯으며 재미있는 걸을 생각해온 지 9년….” 이 작가의 말을 읽다 보면 우리가 술렁술렁 넘겨보는 만화책이 사실은 이야기를 생각하고 그림을 그리고 마침내 완결까지 몇 년의 세월을 견딘 작가의 노력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러니 이번 주말 시간이 된다면, 뜨끈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 만화책 보는 시간 가져 보시길. 생각보다 인생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최근 나를 대상으로 한 실험의 결과, 나는 그랬다.

허진웅

광고회사 이노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낚시든, 악기든, 오토바이든, 세차든, ‘너 좋아하는 게 뭐야?’ 라고 물었을 때 무언가 한가지 서슴없이 대답할 수 있는 삶이야 말로 좋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결혼을 약속한 남친이 있는데 다른 남자와 자고 싶어요 1.

결혼을 약속한 남친이 있는데 다른 남자와 자고 싶어요

‘일본의 갑절’ 위스키값, 한국에서 유독 비싼 이유는? [ESC] 2.

‘일본의 갑절’ 위스키값, 한국에서 유독 비싼 이유는? [ESC]

친구와 화해하기 3단계 해법 3.

친구와 화해하기 3단계 해법

[ESC] 곁에 있어 줘! 목욕탕 4.

[ESC] 곁에 있어 줘! 목욕탕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 746자 5.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 746자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