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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지키는 도시…베를린엔 플라스틱컵이 없었다 [ESC]

등록 2023-02-11 18:00수정 2023-04-08 10:16

지구를 지키는 여행 베를린

유기농·필환경·성평등 일상
역사 과오 외면 않아 인상적
누구나 지속가능 여행 가능해
동서독을 갈랐던 베를린 장벽의 일부분이 남아 있는 공원인 마우어파크.
동서독을 갈랐던 베를린 장벽의 일부분이 남아 있는 공원인 마우어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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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 습관처럼 하는 말이 있다. ‘또 언제 이런 걸 해보겠어.’ 여행 기회가 자주 없다 보니, 여행자는 대부분 과감하고 대담하며 무모하다. 생애 몇 번 못 본다는 이유로 가오리와 돌고래를 쫓고, 시간을 아끼기 위해 도시 간 비행기를 타며, 코앞에 바다를 두고서도 수영장이 딸린 호텔을 선택한다. 우리는 모르거나 외면한다. 우리가 누리는 호사로 여행지가 오버투어리즘으로 얼룩지고 있다는 걸. 한 예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봉쇄령이 내려지자,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운하가 맑아졌다고 한다. 연간 2000만 명이 방문하는 관광지에 사람 발길이 끊기니 환경이 깨끗해졌다는 당연한 이야기다. 이에 베네치아는 올해부터 관광세를 도입해 수입 전액을 환경과 유적지 보수 관리에 사용하기로 했다. 하와이는 관광청 주도로 ‘말라마 하와이’ 캠페인을 진행한다. 여행 업체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자연과 현지인을 배려하는 여행 방법을 소개하는 것이다.

여행자의 행동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고, 여행의 본질적 의미를 되짚는 시간이 필요한 때다. 불편함이 따를 수도, 비효율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때때로 감동은 불편함과 비효율에서 나오는 법이다.

“머그잔에 주세요” 하지 않아도

독일 베를린은 그런 감동이 곳곳에서 넘쳐나는 도시다. 지난해 12월24일부터 올해 1월1일까지 베를린 여행을 했다. 베를린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내내, 내가 상상한 베를린은 1960년대 미국 뉴욕 이스트빌리지의 이미지다. 여성 펑크 록 뮤지션 패티 스미스가 가죽 팬츠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시인 앨런 긴즈버그가 노천카페에서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고 있을 법한.

그도 그럴 것이 베를린은 2000년 초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라는 기치를 세우고, 젊은 예술가를 끌어 당겼다. 자유 분방하고 개성이 뚜렷한 사람들이 모인 도시에는 금방 페미니즘과 퀴어프렌들리의 물결이 일었다. 구글맵에서 베를린의 카페나 음식점, 호텔 등을 검색하면 ‘여성이 소유하거나 운영함’ ‘엘지비티큐(LGBTQ,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트랜스젠더·퀴어)+ 프렌들리’ 등의 정보를 함께 준다. 게다가 베를리너의 첫 인사는 이렇다. “독일어, 영어?” 상대가 동양인이라고 해서 독일어를 모를 것이라는 편견조차 없다. 당신의 성별이, 인종이, 성 정체성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은 도시, 심지어는 인간이든 동물이든 상관없이 모든 존재가 존중받아 마땅한 도시, 그리하여 지구상에서 가장 평등한 도시, 베를린에 도착했다.

자전거를 타는 시민들을 자주 보았던 시내.
자전거를 타는 시민들을 자주 보았던 시내.

건강한 식문화는 베를린의 또다른 자랑거리다. 대부분의 카페, 레스토랑은 비건 옵션을 제공하고, 거리에는 채식 전문점이 줄을 잇는다. 유기농을 사랑하는 이 도시에서는 거리마다 ‘바이오’(Bio)라고 크게 적힌 유기농 전문 매장이 자주 눈에 띄었다. 에데카(EDEKA), 레베(REWE), 알디(ALDI) 등 대형 슈퍼마켓에서도 유기농 마크가 있는 제품이 주를 이뤘다. 베를리너의 유기농 사랑은 100년 전부터 시작됐다. 1926년부터 매년 초 베를린에는 농업∙식품∙원예 분야의 박람회 ‘국제 그린 위크’(International Green Week)가 열린다. 친환경, 생물 다양성, 동물복지 등의 세부 주제를 정해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지속 가능한 먹거리를 선보인다.

포장재는 플라스틱이나 비닐 대신 종이를 사용하며, 매장 한 편에는 각종 식자재와 곡물, 우유, 생수 등 원하는 만큼 담아갈 수 있는 ‘포장재 없는 코너’도 있다. 가장 흥미로웠던 건 ‘판트’(Pfand)라는 빈 병 보증금 환급 제도다. 빈 캔이나 유리병을 마트에 설치된 자판기에 넣으면 회사에서 다시 수거한다. 이때 소비자는 개당 25센트의 보증금을 돌려받는다. 이 제도 덕에 독일은 페트병 재활용률 97.4℅를 달성하는 나라가 되었다(2019년 독일 포장시장연구협회 자료 참고). 한국에서는 카페 음료를 주문할 때마다 “머그잔에 주세요”라는 말을 달고 살았는데,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내부에 일회용품이 없는 건 당연하고, 테이크아웃용 역시 모두 종이컵이다. 연말을 맞아 도시 곳곳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마켓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뱅쇼나 와인을 주문하면 컵 보증금 2.5유로가 함께 붙는다. 이탤리언 전통 파스타 카치오 에 페페를 먹었는데, 커다란 유리 접시에 담아 내줬다.

베를린의 유기농 마켓.
베를린의 유기농 마켓.

일회용품을 쓰지 않았던 거리의 크리스마스 마켓.
일회용품을 쓰지 않았던 거리의 크리스마스 마켓.

베를린에 온 지 5일째 되는 날 숙소를 옮겼다. 요즘 몇몇 예약 사이트에서는 친환경 건축 자재로 지었거나, 오래된 건물을 리모델링했거나, 재생 에너지를 사용하는 숙소를 따로 분류해 보여준다. 베를린의 마지막 숙소 스리 리틀 피그 호스텔(Three Little Pig Hostel)도 그렇게 찾았다. 호스텔의 건물은 1907년 여행자나 임시 거처가 필요한 사람을 위해 지은 교회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엔 군사 병원으로, 그 다음엔 수녀원으로 사용하다 나치 정권 당시 재산과 건물을 모두 약탈당하는 수모도 겪었다. 이제 와 본래 건물의 용도를 되찾은 셈이다.

호스텔을 찾아가는 지도를 따라 안할터(Anhalter)역에 내리자, 곳곳이 풍화되어 무너지고 총알 자국이 박힌 파사드가 가장 먼저 보였다. ‘남쪽’을 뜻하는 안할터역은 1800년대 라이프치히, 프랑크푸르트, 뮌헨, 오스트리아 비엔나, 체코 프라하 등을 오가는 관문이었다. 나치 정권에는 5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강제 수용소로 이끄는 죽음의 문으로 여겨졌다. 전쟁이 끝난 직후 폐쇄되어 대부분 철거되었지만, 파사드의 중앙 부분은 여전히 이 자리에 있다. 안 그래도 트램을 타고 가다 계속 마주치는 베를린 장벽 잔해가 신기하다 못해 이상해질 참이었다. 왜 못생기고 기괴한 철골을 제거하지 않았을까. 그 답을 게슈타포(Gestapo, 비밀 국가 경찰)의 주 활동 지역이었던 프리츠 알브레히트(Fritz Albrecht) 거리에서 찾았다. 이미 사방이 어두워진 오후 4시, 재즈 바를 가는 도중 어둠 속에서 고고히 빛나는 야외 전시장을 발견했다. 지도는 ‘나치의 잔혹 행위에 관한 기록물이 보관된 센터’라고 일러주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공원처럼 드나들며 홀로코스트의 과거를 기억하고 희생자를 추모한다. 그때부터였다. 이 도시를 가해자가 아닌, 희생자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 순간이. 20세기 세계사의 주요 현장은 길이길이 남아 기억의 매개체가 되어야만 했다. 길에서 갑작스레 마주치는 역사의 상흔이 더이상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러워졌다.

스리 리틀 피그 호스텔.
스리 리틀 피그 호스텔.

무엇이 지속가능한 삶일까

사실, 베를린에 오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속 가능한 공간의 모범 사례로 꼽히는 템펠호프 공원(Tempelhofer Feld) 때문이다. 본래 공항이었던 이곳은 냉전시대에 서독 시민에게 생필품을 조달하던 창구였다. 2008년 활주로가 짧다는 구조적 한계와 도시에 소음을 유발한다는 등의 문제로 운영을 중단했다. 그해 10월, 주민투표로 공항 폐쇄가 결정되고 355만㎡의 광활한 부지를 어떻게 활용할지가 도시의 화두였다. 베를린 시는 주택단지로 개발하려 했지만, 시민들의 반발로 결국 공원이 되었다. 베를리너는 공간을 분리해 너와 나를 가르기보다 공유 공간에서 ‘우리’를 경험하는 데 더 큰 가치를 둔 것이다. 비행기가 출발하고 도착하던 활주로 위엔 이제 막 자전거를 배우는 아이들이 열심히 페달을 굴린다. 녹색 잔디에서는 강아지가 뛰어놀며, 어느 날엔 콘서트가 열리기도 한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새해가 밝았다. 다시 베를린을 떠올렸다. 뉴욕의 예술가는 더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대신 주도적으로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만들고 과거에서 미래를 찾는 도시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중요한 건 무엇이고, 그렇지 않은 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 그 중심에는 베를린 여행을 닮고 싶은 나도 있었다.

다양한 제품을 만날 수 있었던 빈티지숍.
다양한 제품을 만날 수 있었던 빈티지숍.

△베를린 여행에서 만난 지속가능 포인트

-제로웨이스트 음식점을 경험하고 싶다면, 프레아(FREA)를 추천한다. 창의적인 비건 요리 뿐만 아니라, 남은 음식과 식자재를 퇴비로 만들어 다시 농장에게 전달하는 순환 시스템, 재활용 자재로 완성한 인테리어 등으로 세계에서 주목받는 비건 레스토랑이다.

-숙박 예약 플랫폼 부킹닷컴은 각 호텔 및 숙소가 지속 가능성을 위해 얼마나 투자하고 노력했는지 알 수 있도록 공개하는 프로그램을 2021년 업계 최초로 도입했다. 지속 가능한 숙소 레벨(1~3)을 잎사귀 모양의 수로 알 수 있으니 숙소 예약 시 참고하자.

-베를린은 빈티지 숍이 많기로도 유명한데, 그중에서도 노이쾰른에 있는 노이츠바이(Neuzwei)를 추천한다. 시대를 초월하는 클래식한 디자인과 패션의 지속 가능성을 추구하는 빈티지 편집숍이다.

글·사진 박진명 <피치 바이 매거진> 에디터

지속 가능한 여행 매거진을 만든다. 텀블러를 사용하고 수영장 없는 호텔을 이용하는 등의 소소한 실천이 지구를 지킨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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