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식물학자다. 식물학자라면 실험실에서 흰 가운을 입고 현미경으로 식물을 들여다보는 조용하고 정적인 모습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연구 분야인 식물분류학은 다양한 야생식물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식물을 채집하고 조사하기 위한 탐험이 필수적이다. 나는 식물을 만나기 위해 산과 바다, 오지를 다니며 자연스레 많은 여행을 한다.
식물은 지구 상 생물량의 총 80%를 차지한다. 그러니까 주변 생명체 중 식물을 만나기는 정말 쉬운 셈이다. 지구에 식물이 많으니 계속 새로운 걸 발견하고 공부할 수 있어서 나는 식물분류학자가 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어딜 가든 식물이 많으니 휴가차 여행을 가서도 나는 결국 식물을 지나치지 못하고 식물에 빠져 있다 돌아온다.
1월 중순, 쉬기 위해 제주도에 여행을 갔다. 봄꽃을 만나긴 이를 거라 예상했는데 반갑게도 몇 가지 만날 수 있었다. 제주도에 봄이 왔다고 하면 뉴스에 산방산 근처 유채꽃밭이 자주 등장한다. 이 계절에도 유채꽃이 피었을까 궁금해 산방산을 찾아가 보았는데 벌써 노란 꽃들이 꽤 피어있었다. 꽃을 보니 작년에 아버지 칠순을 맞아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와서 똑같은 유채밭에서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밭에 들어가려는데 어디선가 할머니 한 분이 나타나 입장료를 내야 한다고 하셨다. 돌담 밖에서 찍으면 공짜, 꽃밭에 들어가면 입장료가 1천 원이라고. 조그만 유채꽃밭에 웬 입장료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할머니는 그 밭 주인이셨다. 돌담 안과 밖을 구분해서 1천 원만 받는 할머니가 귀여웠다. 유채꽃은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에게 밟히면 씨앗을 잘 맺지 못해서 원래 용도대로 씨앗에서 기름을 짜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할머니는 농사를 포기하고 관광객들에게 그 밭을 내어주신 것이다.
유채밭에는 관광객들에게 밟혀 고생하는 다른 식물들도 있었다. 유채꽃과 같은 시기에 피는 냉이와 꽃다지다. 관광객들이 돌담을 넘어가면서 모두 밟고 지나가 버렸다. 사실 돌담 안에 가득한 유채꽃처럼 돌담 밖 냉이와 꽃다지도 봄을 알리는 전령인데 말이다. 시골에 살던 어린 시절 아지랑이 피는 봄에 밭에 가면 제일 먼저 핀 꽃이 냉이와 꽃다지였다. 재미있는 건 이 작은 꽃들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유채꽃을 축소한 듯 똑 닮았다. 유채, 냉이, 꽃다지 모두 십자화과 식물이기 때문이다. 십자화과(Cruciferae)는 꽃잎이 네 개이며 십자(cross) 모양으로 펼쳐져 있어서 이름 붙었다. 그 밖에도 네 개의 꽃받침, 두 개의 짧은 수술, 여섯 개의 긴 수술이 십자화과 꽃의 공통된 특징이다. 큰 유채꽃을 먼저 살펴본 후 냉이와 꽃다지의 꽃을 관찰해보면 작은 꽃의 구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생각해보면 냉이의 씁쓸한 향기는 유채꽃이 가진 향기와 어딘가 닮았다. 어릴 때 집 근처 강변 둔치엔 유채꽃밭이 넓게 조성되어 있었는데 꽃이 너무 예쁘고 황홀했다. 하지만 꽃밭으로 들어가면 멀리서 볼 때 몰랐던 유채꽃 냄새가 썩 좋지 않았다. 향긋하고 우아한 꽃향기가 아닌 쌉쌀한 채소의 냄새다. 그 냄새는 배추나 무를 생각나게 하는데 배추와 무도 십자화과 식물이다. 이 외에도 우리가 즐겨 먹는 양배추, 케일, 순무, 봄동, 컬리플라워, 청경채, 콜라비, 고추냉이, 겨자, 브로콜리 등이 모두 십자화과 식물이다. 십자화과의 다른 이름은 배추과(Brassicaceae)인데 이 이름은 여러 배추 종류(brassica)에서 유래했다.
나는 유채, 냉이, 꽃다지가 보이면 이런 십자화과에 관한 식물학적 내용을 되새기며 이제 정말 봄이 시작되었다고 느낀다. 그런데 올해는 또 다른 십자화과 식물이 내 봄꽃 목록에 추가되었다. 유채밭을 보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브로콜리밭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는데 나는 활짝 핀 브로콜리 꽃을 보고 너무 감격했다. 그 이유는 이렇다.
내가 어릴 때 브로콜리는 지금처럼 흔치 않은 채소였다. 처음 데친 브로콜리를 식당에서 봤을 때 나는 너무 신기해서 먹을 수 없었다. 채소는 재배식물이라 야생식물처럼 내 연구 대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식물이기에 언제나 내 흥미를 끈다. 해외나 국내에 낯선 채소를 발견하면 꼭 사서 관찰하고 식물학적 내용을 찾아본 후 맛을 본다. 이런 습관은 어릴 때부터 있었다.
식당에서 나온 브로콜리를 본 후 나는 당장 브로콜리를 사러 갔다. 막 판매되기 시작한 브로콜리는 당시 꽤 비쌌다. 학생 때라 용돈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나는 비싼 브로콜리를 사 와서 열심히 관찰했다. 몽글몽글한 초록 덩어리 중 가장 작은 덩어리를 잘라 관찰했을 때 그것이 꽃봉오리이고, 브로콜리가 이 수많은 꽃봉오리로 이루어진 형태라는 걸 깨달았다. 너무 놀라 주변 사람들에게 달려가 방금 내가 발견한 이야기를 했는데 누구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나는 이걸 어떻게 해야 제대로 증명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브로콜리를 사서 물병에 꽂아두었다. 브로콜리도 꽃봉오리이니 물병에 꽂아두면 꽃이 피리라 생각했다. 무슨 색 꽃이 필지 기대하는 것도, 거대한 꽃다발이 되는 것도, 사람들에게 거대한 꽃다발을 보여주는 상상을 하는 것도 즐거웠다. 그러나 일주일쯤 지나자 브로콜리는 누렇고 뜨다 갈색으로 변하며 그대로 썩어버렸다. 몇 번 더 시도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꽃집에서 파는 꽃들은 줄기가 잘린 상태여도 집에 가져와 꽃병에 꽂아두면 꽃을 피운다. 하지만 어떤 경우는 꽃봉오리일 때 줄기를 잘라 꽃병에 꽂아도 꽃을 피우지 못한다. 잘린 꽃봉오리가 너무 어리거나, 물을 잘 흡수하지 못하는 줄기 구조 때문이다. 브로콜리도 아마 그런 이유로 꽃을 피우진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실망하고 한참 시간이 흐르는 동안 브로콜리가 꽃봉오리라는 것이 대중적으로 꽤 알려지게 됐고 나는 브로콜리 실험에 실패했던 어린 시절 기억을 잊었다. 그런데 이번에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진짜 브로콜리 꽃을 본 것이다. 나는 내가 상상한 대로 거대한 꽃다발로 자라난 것에 환호했다. 밭 주인이 수확하지 않고 내버려 둔 것인데 내가 키운 것도 아니면서 뿌듯했다. 노란 브로콜리 꽃은 신부의 부케처럼 꽃다발 모양으로 밭에 나란히 자라고 있었다. 가냘프게 흔들리는 유채꽃밭과는 또 다른 풍경이 매력적이었다. 이제 내겐 봄의 전령인 십자화과 꽃이 하나 더 늘었다. 봄에 꽃봉오리를 잘라서 먹지 않고 기다리면 봄을 알리는 브로콜리 꽃을 만날 수 있다. 냉이와 꽃다지, 유채와 더불어 멋지게 봄을 알리는 브로콜리, 너도 봄꽃!
신혜우 식물분류학자
미국 스미소니언에서 식물을 연구하고 있다. <식물학자의 노트>, <이웃집 식물상담소>를 쓰고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