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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와인 한 잔에 천 년 이야기 타래 정도는 가뿐하지

등록 2022-12-03 19:26수정 2022-12-03 20:13

권은중의 생활 와인 토마시 아마로네 클라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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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 요리 유학을 가기 전까지 내가 먹었던 피스타치오는 100% 미국산이었다. 미국산은 푸석푸석한 데도 가격은 비쌌다. 그래서 나는 늘 피스타치오 대신 미국산 아몬드를 선택했다.

그런데 시칠리아에서 맛본 피스타치오는 미국산과 달리 더 고소하고 맛이 풍성했다. 색깔도 보랏빛이 돌아 생동감이 있었다(시칠리아의 농산물은 화산토양 탓인지 뭐든 보랏빛이 돌았다. 브로콜리마저도). 그래서인지 시칠리아의 젤라토, 피자, 햄 등에 아낌없이 피스타치오가 들어갔고 나는 그걸 즐겼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탈리아 피스타치오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구해도 가격이 미국산의 2배 이상이었다. 이탈리아 피스타치오는 한국에서는 누릴 수 없는 사치쯤으로 여기고 있을 때 얼마 전 우연히 이탈리아 피스타치오를 영접했다. 서울 홍대 앞 시칠리아 출신의 셰프가 하는 레스토랑의 피스타치오 피자에서였다.

가격을 알기 때문에 당연히 미국산 피스타치오 가루를 썼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부드러운 감칠맛이 시칠리아 피스타치오 맛이었다. 감격해 하는 나를 보고 셰프는 활화산인 에트나 서쪽 자락의 브론테(Bronte)라는 유명한 피스타치오 산지의 것이라고 알려줬다. 피자 위에 올라간 나폴리의 부라타 치즈와 볼로냐의 모르타델라 햄도 근사했다.

피스타치오 피자와 함께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 지역의 아마로네를 마셨다. 아마로네는 포도 알갱이를 대나무나 짚 위에 올려 건조해 당도를 높이는 방식(아파시아멘토)으로 만든다. 까마귀를 뜻하는 베네토 방언인 코르비나라는 토착 품종을 중심으로 블렌딩한다.

토마시는 전통 방식으로 아마로네를 만드는 와이너리다. 선별한 포도를 말려 술을 빚은 뒤 거대한 슬로베니아산 오크통인 ‘보티’에 30개월을 숙성한다. 말린 포도의 덕에 짙고 감미로운 풍미가 특징인데 체리나 허브향과 함께 발사믹, 브랜디, 초콜릿, 연필심 등을 느낄 수 있다. 진한 풍미와 강건한 구조감 덕분에 햄·치즈와 같은 가벼운 음식은 물론 굽거나 조린 고기와도 잘 어울린다. 높은 당도와 알코올(15도) 덕에 한식과도 궁합이 좋다.

아마로네를 만드는 양조술은 고대 로마에 앞서 시칠리아를 지배했던 카르타고에서 시작된 파숨(passum) 와인에서 유래됐다. 당시에는 기술이 부족해 와인은 금세 식초로 변질했다. 그래서 포도의 당도를 높여 보존 기간을 늘렸다. 파숨 와인은 로마제국을 거쳐 현재 이탈리아의 파시토 와인으로 계승됐다. 이처럼 이탈리아 음식과 와인을 즐기다 보면 천 년은 우습게 뛰어넘는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알토란처럼 나온다.

반면 미국 피스타치오는 1929년 이란에서 미국 캘리포니아로 가져간 9㎏의 씨앗에서 단 한 개의 씨앗이 살아남아 뿌리를 내리면서 재배가 시작됐다. 1970년대 미국은 중동을 따돌리고 세계적인 피스타치오 수출국이 됐다. 그렇지만 미국산 피스타치오는 원산지인 페르시아를 거쳐 피스타치오를 받아들인 이탈리아의 피스타치오처럼 종의 다양성과 역사의 깊이에서 오는 풍성함을 기대하긴 어렵다. 카르타고인들이 고안한 와인 제조법을 고대 로마와 중세 베네치아에 이어 현대까지 구현하고 있는 아마로네 와인의 풍성한 이야기 역시 신대륙의 와인이 가지지 못한 깊이가 있다.

글·사진 권은중(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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