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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문턱에 접어들면 집안 온도를 점검하게 된다. 나는 서울 남산 기슭 마을, 해방촌에 있는 오래된 주택에서 살기에 아파트와 달리 겨울 채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다행히 번거로운 마음보다 꽤 낭만적인 우리집만의 루틴이라 여기며 즐긴다. 두툼하고 포근한 겨울 이불을 침대에 덮고, 레이스 커튼은 찬바람을 막아줄 솜 누비 커튼으로 교체한다. 털이 복슬복슬한 슬리퍼를 장만했으며 의자마다 무릎담요를 걸쳐둔다.
체감온도를 높여주는 방한 살림을 준비하는 것만큼 감성 온도를 따뜻하게 올리는 방법도 필요하다. 선물로 받은 각종 캔들을 눈길이 닿는 곳곳에 두고 긴 겨울밤을 함께 보내는 다정한 친구로 삼는다. 특히 책을 읽을 때 켜면 집중도 잘 되고 운치를 즐기기에도 그만이다. 실제로 찬 공기가 고여 있는 창가 부근에 촛불을 켜면 주변 온도가 2~3도 정도 올라 따스함을 더해준다고 한다.
평소에는 이 정도로 겨울 채비를 마무리하지만 이번에는 유독 욕심나는 아이템이 생겼다. 바로 조명이다. 아늑한 조명 빛은 눈으로 느끼는 시각의 온도를 높여 마음에도 기분 좋은 온기가 차오를 것 같아서다. 물욕이 왕성한 맥시멀리스트의 소비 합리화 같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근거 없는 생각은 아니다. 덴마크나 핀란드 같은 겨울이 길고 추운 나라에 유명한 조명 디자이너와 브랜드가 많은 것은 조명이 공간에 안락함과 편안함을 채워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겨울에 들이는 조명이라면 빛을 은은하게 품는 한지 소재가 더할 나위 없겠다는 판단에 이르러 갖고 싶은 한지 조명 위시리스트를 만들어 보았다. 나의 마음에 그린라이트를 켜준 공예 작가들의 한지 조명 중에 선발했다.
엄윤나 작가의 백미(白眉) 시리즈 조명. 엄윤나 제공
첫 번째는 엄윤나 작가의 ‘백미’(白眉) 시리즈 조명이다. 한지를 꼬아 끈을 만들고 이 선을 엮어 입체를 이루는 작업을 ‘시간테’라 부르는데, 이 시간테를 기본으로 조명과 거울, 합을 비롯해 다양한 오브제로 확장된다. 하나의 입체가 되기까지 오랜 노동 시간이 필요하고 수행과 같은 고된 반복 행위를 거친다. 친환경적인 지속성과 순환을 위해 충북 괴산의 신풍한지를 사용하고 천연 염색을 해 자연의 색을 입혔다. 여기에 흙을 빚어 구운 돌과 함께 구성해 조형을 완성한 조명은 ‘태초에 아름다움이 있었다’라는 말이 떠오르는 원시적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벽에 설치해 불을 밝히면 동굴 속에 있는 듯한 색다른 감각이 전해질 듯하다. 엄윤나 작가의 백미 시리즈 조명은 12월 8일부터 11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 시(C)홀에서 열리는 ‘2022 공예트렌드페어’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양정모 작가가 지난 8월 서울 용산 라흰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페이퍼 램프, 뉴 티폴로지즈>(Paper Lamp, New Typologies)에서 선보인 지등(紙嶝)이다. 대나무로 틀을 잡고, 한지를 씌운 간결한 디자인은 조명의 본질을 추구하고자 하는 작가의 본심을 밝힌다. 조명이 단독으로 돋보이기보다 어둠을 온화하게 밝히며 공간과 어우러지길 바란다는 작가의 바람으로 전통 문양이나 장식 요소를 철저히 배제해 한지의 멋을 담담하게 담고, 단정한 조형미를 전한다. 날 서고 강직된 감각을 편안하게 어루만져 주는 빛이 필요한 침실과 서재 조명으로 제격이다.
양정모 개인전 <페이퍼 램프, 뉴 티폴로지즈>에서 선보인 지등. 양정모 제공
권중모 작가의 플로어 조명 엘에프(LF)04. 권중모 제공
빛을 은은하게 머금고 발산하는 한지의 물성을 조명에 가장 잘 활용하는 권중모 작가의 ‘레이어즈 펜던트’(Layers_Pendent)를 마음에 품은 지는 이미 오래다. 조선 시대 왕의 곤룡포가 걸린 모습에서 착안한 디자인은 한복의 부드러운 선을 보여주고, 한지를 겹겹이 겹쳐 빛의 농도를 달리한다. 낮에는 흰 구름 같고, 밤에는 달빛 아래 눈 쌓인 언덕 같은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한옥의 창호에서 영감을 얻어 한지 조명 작업을 시작한 권중모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탐나기는 마찬가지다. 한복의 주름에서 착안해 한지를 일정한 가격으로 접어 원형이나 전통 문양 디자인의 틀에 더한 테이블 조명과 플로어 조명은 다채로운 농담으로 공간에 빛의 수묵화를 그린다.
소동호 작가의 오리가미 시리즈 한지 조명. 소동호 제공
가구와 사물을 디자인하는 소동호 작가의 한지 오리가미 시리즈 조명도 처음 본 4년 전부터 감탄해온 작품이다. 평면 도면을 입체화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진 작가가 한지를 아코디언처럼 접어 기하학 구조를 연출했다. 빼어난 조형미 덕분에 전등갓으로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 장식 오브제로 공간을 채워도 좋다. 2009년에 첫선을 보인 오리가미 조명의 소재로 한지를 적용한 것 외에도 소동호 작가는 전통 소재와 기법을 다양하게 활용한다. 옻칠과 소목을 장인으로부터 배웠고, 다양한 공방에서 한지, 매듭, 완초(왕골), 쪽염(쪽물을 들이는 전통 염색) 등을 익혔다. 전통에서 영감을 얻어 모던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는 토대가 되었다. 이런 정성과 감성이 담겼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오리가미 조명에 대한 마음속 그린라이트는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은 디자인 스튜디오 ‘오리진’의 서현진 디자이너가 선보인 ‘륜’이다. 디자인의 모티프는 전통 부채 중 하나인 ‘대륜선’이다. 360도 원형으로 펼쳐지는 대형 부채로 조선시대 궁중에서 왕비나 공주, 옹주가 햇빛을 가리는 데 사용한 대륜선은 스탠드와 결합해 근사한 조명으로 거듭난다. 궁중의 물건답게 공간에 품격을 더하는 것은 물론 일반 쥘부채처럼 접었다가 펼쳐지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해 보관과 이동도 편리하다.
세상에는 수많은 조명이 있다. 일명 ‘국민 조명’이라 불릴 정도로 인테리어에 웬만큼 관심 있는 이들은 알고 있는 덴마크 태생의 조명들을 비롯해 리빙 브랜드들은 각자 아름다운 조명 라인업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공예 작가들의 조명에 마음을 두는 이유는 그들의 손맛이 주는 온기까지 담겨 있어서다. 작품 구상부터 소재 발굴, 심지어 제작까지 손수 하는 경우가 많다. 그 치열한 노동의 결실과 응축된 에너지는 빛나는 아우라를 발산한다. 그 매력에 반해 공예품을 사랑하고 공예를 아낀다. 추운 해방촌의 겨울 공간을 아름다운 솜씨로 훈훈하게 꾸미고 싶은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박효성 리빙 칼럼니스트
잡지를 만들다가 공예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우리 공예가 가깝게 쓰이고 아름다운 일상으로 가꿔주길 바라고 욕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