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동작. 달리기를 설명하는 말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일까. 달리기는 운동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종목으로 꼽힌다. 인간에게 달리기란 곧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에서, 달리기해야 하는 상황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 굳이 시간을 내서 달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지하철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나 약속 시간에 늦어 서둘러야 했을 때가 최근 가장 숨 가쁘게 달린 기억으로 남아 있을 테다. 우리는 아직 ‘인류’가 되지 않았던 수백만 년 전의 유인원 조상들과 다른 삶을 산다. 돌멩이를 갈아 만든 도끼나 나무를 깎은 창을 들고서 사냥감을 무리 지어 쫓아다녔던 그 시절과 오늘날의 달리기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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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과정’을 만나기 시작했다
아직 문자가 발명되지 않아 이 칼럼처럼 글로 생각을 전할 방법이 없던 우리 조상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달렸을까? 정확히 확인할 길은 없지만, 스마트 워치가 알려주는 이동 거리와 평균 속도, 심박 수를 확인하며 달리지 않았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그 시절의 달리기는 세계 곳곳에 남은 동굴벽화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어떤 기후에서 살았는지에 따라서도 달리기의 종류가 달랐던 것 같다. 숲이 울창한 지역에 살았던 네안데르탈인 유해를 분석한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그들은 숲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사냥감에 민첩하게 반응하고 뒤를 쫓도록 폭발적인 속도를 내는 데 최적화된 신체를 지니고 있었다.
유전자 검사를 해보니 오늘날의 단거리 달리기 선수와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방이 트여 있는 곳에서 살았던 종족들은 좀 더 장거리 달리기에 최적화된 방향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탁 트인 초원에서, 우리의 조상들은 돌림노래를 하듯 번갈아 달리며 지구력 레이스를 펼쳤다. 제 몸보다 몇 배 큰 사냥감이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을 것이다. 그때의 달리기는 더 건강한 삶을 위한 습관이라기보다 생존 목적의 몸부림이었다.
인류가 살아온 시간 전체를 따져보면, 우리가 살아 있는 21세기의 지금은 찰나에 불과하다. 우리 몸 안에는 아직도 네안데르탈인 시절의 본능이 탑재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달리기를 하면 고대의 인류가 겪었고 우리는 기억도 못 하는 반응이 우리 몸에서 다시 활성화된다. 교감신경이 깨어나 심장이 나르는 피의 용량이 늘어나고, 그에 따라 시신경도 활성화되어 주변을 또렷이 보게 된다. 유전자 깊숙이 새겨진 생존 본능이 눈을 뜨는 것인데, 제대로 된 러닝화 하나 없이 숲 속에서 사슴을 쫓거나 초원에서 들소를 몰던 조상님들의 수렵 생활을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인류가 더는 수렵채집 생활을 하지 않는 지금, 우리의 달리기는 조상들의 생존 달리기와 다르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압박이 없는 상태에서도 우리의 신경은 해상도를 높이고, 그 결과 이어폰을 끼고 휴대전화 화면만 보며 다닐 때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것들을 온몸으로 더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놀랍게도, 이렇게 해서 만나게 된 존재 중에는 사람보다 사람 아닌 것이 더 많다. 같은 동네에 10년이 넘게 살면서도 자세히 올려보지 않았던 길가의 큰 나무랄지, 공원 한쪽 덤불 뒤에 캠프를 차려 놓고 항상 비슷한 시간에 나타나는 고양이 가족, 해가 뜨고 지는 시간에 맞춰 일제히 꺼지고 켜지는 가로등, 계절의 변화에 맞춰 모습을 바꾸는 동네 뒷산의 모습 등이 그러하다. 내게 이들 모두는 오랫동안 그저 한 덩이로 묶인 ‘배경’에 불과했던 존재들이다. 버스에 몸을 맡기고 이동할 때 창밖으로 스쳐 지나던 풍경, 출발지와 목적지만 존재하는 이동 경로에서 ‘중간 과정’에 속했던 것, 지도 앱에서 가장 빠른 경로를 찾기만 해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길 위의 존재들이었다.
매일 달리기 덕분에 언제나 배경으로만 생각했던 풍경들을 눈여겨 보게 됐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2m를 넘길 수 없는 인간의 보폭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매일 스쳐 지나면서도 제 목소리를 가진 존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수많은 것들이 제 목소리를 내는 주체로 변하기 시작했다. 물론, 주로 한국어나 영어라는 인공 언어로 세상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나로서는 이들이 정확히 어떤 목소리를 내는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테다. 하지만,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수많은 존재의 목소리를 알아채는 것만으로도 나는 완전히 다른 시선을 가진 사람으로 변했다(는 걸 이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어느 날 알 수 없는 이유로 밑동이 잘려 사라진 큰 가로수를 보며 안타까워하고, 항상 같은 자리에 있는 나무가 사계절을 겪는 모습을 함께 하며, 보도블록이나 어느 집 담장의 넝쿨, 언덕이나 길에도 각자의 인상 혹은 성격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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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더 큰 그림의 한 조각일 뿐
매일 달리기 덕분에 나무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거나 세상 모든 사물에 영혼이 깃들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매일 달리기를 반복하면 할수록, 나는 인간이 그저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는 또 다른 존재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생각은 달리기가 지닌 단출함에도 빚을 지고 있다. 일상생활의 많은 활동은 어떤 식으로든 인공적 도구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지만, 달리기는 러닝화와 운동복이라는 최소한의 도구만 활용하며 대부분을 우리의 몸에 기댄다.
인간은 무릇 기술과 도구를 통해 확장되어야 한다 여기는 사람이라면, 달리기는 그런 이점을 일부러 제거한 채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활동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 달리기의 핵심이 있다. 달리기는 우리를 21세기의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많은 도구 없이 연약한 몸만으로 다른 존재들과 함께 숨 쉬어볼 수 있는 시간이다. 그렇게 함께 하는 존재가 인간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인간 또한 더 큰 그림의 한 조각일 뿐이기 때문이다.
박재용 프리랜스 통번역가·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