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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쏘공’ ‘타는 목마름으로’ 초판, 발품이 만든 행운이죠

등록 2022-11-18 22:00수정 2022-11-19 08:10

[ESC] 나의 짠내 수집일지
미술책·LP 찾다 덤으로 얻은 책
엄혹한 시절 소환한 진귀한 헌책
이은상 등 친필·낙관 찍힌 시집도
시인의 친필 서명이 있는 <조국강산>과 <국화 옆에서> 초판본, 리영희 선생의 서명이 남은 <중국백서>.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시인의 친필 서명이 있는 <조국강산>과 <국화 옆에서> 초판본, 리영희 선생의 서명이 남은 <중국백서>.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한때 서울 청계천과 대학가엔 헌책방이 즐비했지만 대형 서점에 밀려 동네 서점이 쇠락한 현실에서 헌책방의 존재감은 더욱 희미하다. 신촌 ‘숨어있는 책’과 ‘공씨 책방’, 이문동 ‘신고 서점’ 금호동 ‘고구마 책방’, 홍제동 ‘대양 서점’ 등 유서 깊은 헌책방은 비싼 임대료, 재개발 등으로 이전하거나 규모를 축소했다. 아예 폐업한 곳도 있다. 서울 동묘 인근, 인천 배다리마을에 몇몇 헌책방이 명맥을 유지하지만 전성기엔 견주기 어렵다.

그런데 여전히 헌책방을 습관처럼 찾는 이들이 있다. 어떤 이는 색바랜 종이의 질감과 독특한 향취에서 행복을 얻는다. 수집벽 때문에, 또는 절판된 책을 찾아 헤매는 사람도 있다. 이름값 하는 고서나 화집, 소설 초판본을 득템하길 욕망하는 이들이다. 그런 기회는 거의 오지 않는다. 문학사에 획을 그은 책 초판본은 대부분 수집가 손에 들어가 있다. 하지만 어디에나 틈새는 있고 발품을 팔다 보면 운수 좋은 날도 있는 법, 짠내 수집 과정에서 횡재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가치 있는 책을 몇 권 소장하게 됐다.

난쏘공 초판, 정말 초판일까?

일단 1978년 문학과 지성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한 조세희 작가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초판본이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판매자가 “초판”이라고 주장한 책이 있다. 청계천 복원을 추진하면서 그나마 명맥을 잇던 주변 헌책방이 하나둘 짐을 싸던 2003년 한 헌책방에서 세로쓰기 책 한권을 만났다. 초판인지 확인하려 안쪽 종이 맨 뒷장을 펼쳤다. 그곳만 찢겨 나갔다. 형상을 봐선 분명 초판인데 증명할 수가 없었다. 내 행동을 살피던 헌책방 주인은 “인쇄 상태, 활자체, 표지 그림 등을 보세요. 초판이 확실해요”라고 주장했다. 얼마냐고 묻자 “몇만 원은 받아야 하지만, 점포 정리 중이니 3천 원만 달라”했다. 그냥 샀다. 자장면 한 그릇 값인데…. 아니 달항아리를 닮은 푸른 하늘에 새가 날고 갓난아이를 안은 엄마와 어린아이를 간명하게 그린 표지가 마음에 푸근히 와 닿았기 때문이다. 정말 초판일까? 요즘도 의문이 든다. 출간일, 저자의 도장(1970년대, 그 시절엔 출판사가 판매 부수를 속이지 못하도록 작가가 붉은 인주로 도장을 찍어줬다.) 등이 찍혀 있을 속지 마지막 장이 찢겼으니 영원히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산동네 철거민 난쟁이 가족의 삶을 통해 산업화 시기 도시 빈민 공장 노동자의 처절한 삶을 풀어낸 빛바랜 헌책이 뿜어내는 아우라는 여전하다.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창작과 비평사·1982년),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풀빛·1984년), 김남주 시인의 <나의 칼, 나의 피>(인동·1987년) 등 그 시절 청계천 헌책방에서 수집한 몇 권은 초판임을 증명하는 속지 끝장까지 온전하다. 적당히 변색한 시집을 볼 때마다 민주주의, 평등, 평화에 대한 간절함을 떠올린다.

저자, 역자 등의 친필 서명이 있는 미당 서정주 시인의 &lt;국화 옆에서&gt;와 리영희 선생이 편역한 &lt;중국백서&gt;.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저자, 역자 등의 친필 서명이 있는 미당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와 리영희 선생이 편역한 <중국백서>.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청계천에서 얻은 헌책 가운데 웃픈 현대사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lt;좌경이론의 실제&gt;.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청계천에서 얻은 헌책 가운데 웃픈 현대사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좌경이론의 실제>.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청계천에서 얻은 헌책 가운데 웃픈 현대사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것도 있다. <좌경이론의 실제(Ⅰ) (Ⅱ)-서울지검 공안부 편>이다. 민족해방(NL), 민중민주(PD) 등 1980년대 이른바 운동권을 양분했던 정파의 핵심 논리가 담긴 팸플릿 25개를 모은 이 책의 발행 기관은 서울지방검찰청으로 적혀 있다. ‘반제민중민주화운동의 횃불을 들고 민족해방의 기수로 부활하자’, ‘우리는 간첩 박헌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혁명운동의 기수를 제헌의회 소집으로’, ‘무엇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진군을 가로막고 있는가?’ 등 1980년대 변혁을 꿈꾼 이들이 한국 사회의 구조와 모순을 해석하고 투쟁 방향을 제시한 핵심 이론을 망라했다. 실존하던 서울지검 공안부 제1부장 김재기 명의로 쓰인 <좌경이론의 실제(Ⅰ)> 서문에는 “용공 좌경 공산주의 세력은 필사적으로 민주화운동이라는 외피를 쓰고 정부의 단호한 대처를 민주화운동의 탄압이라는 선전 선동으로 대다수 국민을 현혹하고 있다 (…) 이런 선전 선동 획책에 대다수 국민이 현혹되어 왔던 것은 물론이요 일부 지식인들까지 이에 호응하고 있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상황을 진단하며 “이것은 정부나 용공 좌경세력 척결이라는 의무를 가진 부처 그리고 검찰에서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용공 좌경세력의 실체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가 부족했던 점에 많이 기인하고 있다”고 적었다. 그리고 “이제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그동안 용공 좌경세력의 수사에서 얻은 실제적인 경험으로 그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담은 본 자료집을 발간하게 된 것도 그간 미비했던 반용공좌경 대책의 하나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명시했다. 용공 좌경세력 척결을 위해 검찰청 공안부가 책을 발간했다는 것인데, 이른바 지하 운동권에서 검찰·경찰의 수사와 판매금지 등을 피하기 위해 검찰청 공안부 이름을 도용한 것이다. 실제 당시 ‘불온서적’ 압수 수색을 하던 검·경도 이 책을 정부 공식 출판물로 오인하고 압수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돌았다. 지금은 찾기도 어려운 희귀한 민주화운동 관련 자료다.

‘남재희 전 장관 기증 도서판매전’에서 구한 &lt;창비&gt; 창간호와 2호.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남재희 전 장관 기증 도서판매전’에서 구한 <창비> 창간호와 2호.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한발 먼저 챙긴 창비 창간호

내게 헌책은 엘피(LP)나 인상파 화가의 그림이 담긴 미술책을 구하러 헌책방을 뒤지다 곁다리로 얻은 일종의 짠내 부산물이다. 그런데도 이런 행운은 예고 없이 찾아오니 헌책방을 탐문하는 수고를 멈출 수 없었다. 노산 이은상 시인이 친필 서명과 낙관까지 찍어 누군가에게 선물한 듯한 시집 <조국강산>은 금호동 ‘고구마 책방’에서, 미당 서정주 시인이 친필 서명을 해 준 <국화 옆에서> 초판은 신촌 ‘숨어있는 책’에서 건졌다. 발견의 순간, 헌책방 주인이 가격을 높게 부를까 봐 친필 서명이나 낙관이 찍힌 부분은 겉표지 갈피 밑에 숨겨 건네던 때가 생각난다. 그리고 3천원을 넘지 않는 가격에 책을 받아들고 나설 때 짜릿한 희열을 느꼈다.

신문사에서 일하다 보면 귀한 책을 얻을, 별책부록 같은 기회가 오기도 한다. 사내 도서저장 공간이 부족해 보유 장서를 정리하면서 가끔 ‘사내 북 페어’를 여는 데 유명인사들의 서명이 담긴 초판이 섞여 나오기 때문이다. 리영희 선생이 편역한 <중국백서>를 송건호 선생께 서명해 드린 게 대표적이다.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건 1966년 겨울 발간한 <창비> 창간호다. 백낙청 선생의 창간사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 이호철의 ‘고여 있는 바닥―어느 이발소에서’, 김승옥의 연재소설 ‘다산성―돼지는 뛴다’ 등이 담긴 70원짜리 창간호는 수집가들 사이에 귀한 대접을 받는다. 이 책도 우연히 나를 찾아왔다. <한겨레>에 오랫동안 칼럼을 써 온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이 2016년 “한겨레 임직원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데 작은 밑거름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며 평생 모은 1만여권의 책을 기증했다. 사내 구성원은 물론 일반인에게도 개방한 ‘남재희 전 장관 기증 도서판매전’ 때 나는 1만여권의 책 무더기 속에서 <창비> 창간호와 2호를 찾아냈다. 책 초판을 모으는 게 취미인 한 후배 기자는 “창비가 다 있으니 분명 초판이 있을 만한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했다. 나는 “내가 한발 앞서 챙겼다. 미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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