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서는 매년 107개 주의 ‘삶의 질’ 순위를 발표한다. 이 발표에서 늘 최하위권 지역의 하나가 시칠리아 아그리젠토다. 2018~2019년은 107개 주 가운데 꼴찌였고, 올해 발표한 2020~2021년도 순위도 95위였다.
아그리젠토는 고대 그리스에 건설한 신전들의 원형을 그리스보다 잘 보존하고 있어 유명하다. 그런데 내가 2019년 시칠리아에 갔을 때, 이 신전들을 보고 싶어 버스 편을 알아보다 깜짝 놀랐다. 유명 관광지인데도 버스가 우리나라 첩첩산중 마을처럼 하루에 몇번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그리젠토를 고대 그리스의 빛나는 유산을 제대로 품지 못한 가난한 시칠리아 도시쯤으로 기억해 왔다.
‘플라네타’는 이런 아그리젠토에서 1980년대 중반 문을 연 늦깎이 와이너리다. 플라네타가 1995년 선보인 첫 작품은 뜨거운 시칠리아에 어울리지 않는 샤르도네였다. 세계 유명 와이너리와 계급장을 떼고 붙어보겠다며 샤르도네로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그런데 무모한 도전은 플라네타라는 한 와이너리의 성공에 그치지 않고 시칠리아 와인 르네상스로 이어졌다.
아그리젠토에서 생산한 두번째 화이트 와인인 ‘코메타’(이탈리아 말로 혜성이라는 뜻)는 피아노라는 나폴리 인근에서 나는 품종으로 만들어졌다. 시칠리아 와이너리에서는 처음이었다. 나폴리와 시칠리아는 고대부터 식민지 수난을 함께 겪던 운명 공동체였다. 코메타는 짙은 꽃향기와 탄탄한 구조감으로 토착 품종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이어 플라네타는 2016년 아그리젠토 일대의 토착 품종인 그릴로로 ‘테레빈토’를 선보였다. 혁신적인 플라네타가 이 품종을 어떻게 해석했을지 궁금했는데 최근 국내에도 출시됐다. 테레빈토는 참 짱짱하다. 자몽이나 레몬이 먼저 느껴졌다가 꽃향기와 사과 배 등의 여러 과일 맛이 이어진다. 15도의 온도로 스테인리스 탱크에서 6개월을 숙성해서 달고 가벼운 기존 그릴로와는 차별점이 있다. 화이트인데도 도수가 14도다. 2만원대의 가격이지만 음식 없이 즐길 수 있을 정도의 완결성이 있다. 함께 매칭한 음식은 해산물 라구 라비올리였다. 테레빈토의 맛과 향 그리고 탄탄한 구조감은 말린 새우살로 속을 채운 라비올리의 진한 풍미를 우아하고 섬세한 여운으로 바꿔줬다. 음식과 즐기면 맛을 끌어올리는 이탈리아 화이트 와인의 기본에도 충실했다.
그릴로는 주목받던 품종이 아니었다. 자체를 내세우기보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주정강화 와인 마르살라를 만드는 포도쯤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릴로는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카타라토와 모스카토 교배종이어서 카타라토 산미와 모스카토 당도라는 각각의 장점을 모두 품었다. 카타라토와 모스카토는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시칠리아에 전파한 품종이다. 이런 스토리만으로도 그릴로는 신화와 전설의 섬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품종의 하나가 될 자격이 있다.
와인 이름인 테레빈토는 시칠리아 등에서 자라는 낙엽송의 이름이다. 생명력이 좋아 가뭄에도 잘 견디며 암석을 깨고 뿌리를 내리기도 한다. 기원전 8000년부터 외세의 식민 통치를 받아왔던 시칠리아와 닮았다.
플라네타는 내가 불편한 교통을 탓하며 발걸음을 돌렸던 아그리젠토에서 샤르도네, 피아노에 이어 그릴로 품종에도 새로운 개성을 입혔다. 시칠리아 자연환경과 역사를 씨줄 날줄 삼아 와인을 빚어온 플라네타 덕에 나는 시칠리아 서남부의 아그리젠토에 갈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권은중 음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