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간 잠들어 있던 운동복을 꺼내 달리기를 시작한 2020년 봄엔 2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매일 (명상과) 달리기를 하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달리기를 통해 ‘도전’하고 ‘극복’하는 게 아니라 그저 따뜻한 샤워를 하러 가는 과정에 달리기가 포함되어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까지는 쉬웠다. 한바탕 땀 흘리고 하는 샤워만큼 개운한 게 없다는 사실 또한 매일 달리기에 동력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매일 달리기 100일째를 향해 가던 2020년 6월 말, 달리기를 망설이게 하는 첫번째 장애물이 등장했다. 바로 매년 6월 말부터 7월 하순까지 이어지는 한반도의 장마. 게다가 지구 온난화로 동아시아 전반의 여름철 강수량은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빗속 달리기를 처음 시도한 날은 2020년 6월25일이었다. 그날 남겨둔 기록에 따르면 나는 오전 5시30분께부터 한시간가량 달리기를 했고, 처음 해보는 빗속 달리기가 걱정되어 전날 밤 빗속 달리기를 위한 복장까지 머리맡에 챙겨 놓고 잠들었다. 다행히 비는 그리 세차게 내리지 않았다. 그날의 달리기를 돌아보니, 그저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무게중심을 최대한 낮추고 천천히 달렸던 기억뿐이다.
‘빗속을 달린다’는 느낌이 제대로 들었던 첫번째 달리기는 그로부터 약 3주 뒤, 장마철 중반에 이른 2020년 7월12일 새벽이었다. 걱정했던 것처럼 빗발이 굵지는 않았지만 빗속 달리기에 좀 더 적합한 복장을 갖추고 뛰었다. 러닝 티셔츠 위에 방수 재킷을 입었고, 젖지 않는 소재의 야구모자를 써 시야를 확보한 뒤 그 위에는 재킷에 달린 후드를 썼다. 후드에 달린 고무줄은 머리에 맞도록 꽉 죄어 빗물이 뺨이나 목을 타고 재킷 속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했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을 반사하는 형광 벨트도 맸다.
세찬 빗속을 달리고 싶었던 2021년 여름. 방수 기능이 있는 판초 우의는 체온 유지에 도움이 된다. 박재용 제공
그리고 ‘비를 뚫고 달린다’는 느낌을 처음으로 겪은 건 그해 장마가 끝나갈 무렵인 8월2일 오전의 달리기였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집을 나서면서 ‘이런 비를 뚫고 달리기를 해도 되나?’라는 생각에 몸을 돌려 현관으로 돌아갈까 망설였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며 빗속으로 뛰어들자 귓전을 때리는 빗소리와 행여나 미끄러질까 무게중심을 낮추는 데 신경 쓰느라 다른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도 생생하다. 이날 달리기 중엔 빗발이 너무 거세져 잠깐 비를 피할 곳을 찾기도 했다.
오랜 세월 동안 달리기는커녕 몸 쓰는 일 자체를 그리 즐기지 않았던 입장에서, 여름철 빗속 달리기는 의외의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먼저, 빗속 달리기가 생각보다 ‘할 만하다’는 사실. 생각해보면 비가 내리면 비를 피할 궁리만 했지 그 안으로 뛰어들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애초에 젖지 않겠다는 생각일랑 접어두고 빗속으로 뛰어들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쏟아지는 빗속에서는 방수 재킷이나 운동화 역시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빗속 달리기는 심지어 더 쾌적한 달리기를 보장해준다. 범람을 앞둔 천변이나 비가 와도 유동 인구가 많은 거리처럼 위험한 곳만 피한다면, 한 치 앞을 가늠하기 힘들 만큼 쏟아지는 비는 우리의 달리기 코스를 좀 더 한적하게 만들어줄 도움의 손길이 되기도 한다.
빗속 달리기를 처음 경험한 2020년 여름 어느 날. 미끄러질 것 같아 잠시 멈췄다. 박재용 제공
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2020년의 긴 장마철 덕에 빗속 달리기의 강도를 서서히 높였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빗속 달리기를 한 첫날 폭우 속에서 정신없이 뛰었다면 그날이 매일 달리기의 마지막날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빗속 달리기에는 조심해야 할 점이 많다. 무엇보다 비로 인해 흐려진 시야와 평소보다 미끄러운 바닥, 행인이 없을 거라고 방심해 갈 길을 서두르는 차 등 안전에 유의해야 한다. 차가 드문 길을 따라 달릴 때도 반드시 반사 벨트 등 안전 장구를 잊지 말자. 빗발만 굵은 장맛비가 아니라 거센 바람을 동반한 태풍이 인다면, 비바람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는 편도 좋다.
빗속에선 몸이 보내는 신호에도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대체로 안정적인 환경이 유지되는 실내에 익숙해진 우리의 몸은 평소와 달리 가혹한 환경에 노출되었을 때 생존 모드를 발동한다. 교감신경이 활성화되어 심장이 빠르게 뛰고 근육이 조여든다. 따라서 고혈압이나 심장 질환이 있는 사람이라면 빗속 달리기는 절대 피하는 게 좋겠다. 게다가 비에 흠뻑 젖은 상태에서 몸놀림을 멈추면 금세 체온이 내려가 저체온증에 빠질 수도 있다. 방수 기능이 있는 재킷이나 모자를 착용해 조금이라도 몸이 젖는 속도를 늦춰야 하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피부가 쓸리거나 발목이 삘 경우를 대비해선 압박 양말을 신는 것도 좋다.
만약 빗속 달리기를 위해 갖춰야 할 갖가지 장비가 부담스럽다면? 충분한 준비운동으로 체온을 높인 뒤 옷이 젖거나 몸이 차가워질 틈도 없이 잽싸게 달려보자. 집 앞 편의점이나 평소 눈여겨보던 가로수까지 달려갔다 돌아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매일 달리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더 빨리, 더 멀리 달리는 게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내일도 오늘처럼 부상 없이 즐겁게 달리는 일이다. 매일 달리기를 시작하고 3년차가 된 지금은 여름이 다가올 때마다 폭우 속 달리기를 은근히 기대하기도 하지만, 매일 달려도 매일 힘들고 어려운 게 또한 달리기의 매력이기도 하다. 비를 뚫고 달리든 화창한 날 시원한 공기를 가르며 달리든, 이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박재용 프리랜스 통번역가·큐레이터
2020년 봄 우연히 달리기를 시작한 뒤 지금까지 매일 달리고 있다. 인스타그램 @one_day_one_run에 기록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