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짓수의 매력은 상대의 반사적인 반응을 이용하며 몸을 움직이는 데 있다. 양민영 제공
“주짓수 재밌어요?”
어느 토요일 저녁 나는 페미니스트 친구, 그리고 그가 소개한 새로운 친구 엘(L, 당연히 그도 페미니스트이다)과 비건 식당에 앉아서 시간 가는 걸 잊었다. 엘은 만나기 전 기대한 것 이상으로 재미있고 똑똑하고 특히 어린 시절에 운동선수였던 의외의 이력까지 갖추어서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런 그가 주짓수에 관심을 보였고 두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완전 재밌어요! 기본 원리가 상대의 리플렉스(반사적인 반응, 동작)를 이용하는 건데, 그게 진짜 재밌어요. 몸을 움직이는 동시에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나는 이렇게 대응한다는 걸 머리로 계속 구상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주짓수를 몸으로 두는 체스라고 하는 거예요.”
듣고 있던 엘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갑자기 흥미가 확 생기는데요!” 그의 눈이 아까보다 더 반짝이는 것 같았다.
주변 여성들이 주짓수에 관해서 물어볼 때마다 나는 이른바 ‘영업’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주짓수의 감춰진 이면에 관해서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걸 모두 말했다가는 영업은커녕 그들의 ‘배우고 싶은 운동 리스트’에서 주짓수가 영원히 지워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내 영업 멘트가 거짓인 건 아니다. 앞서 말한 주짓수의 기본 원리가 근사한 것도 사실이다. 다만 기본 원리에 따라서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기술을 구사하려면 거친 개싸움을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반복의 대가는 시간과 몸(정확히는 관절)으로 지불한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내 목은 움직일 때마다 도드라지는 통증을 일으켰다. 지난밤에 주짓수 기술 가운데 초크를 배우느라 쉴 새 없이 목이 졸린 탓에 목 주변의 근육이 찢어진 것 같다. 그리고 팔 안쪽에는 누군가의 손가락 크기와 꼭 들어맞는, 학대흔이나 다름없는 멍이 못해도 서너개쯤 숨어 있다.
누가 진짜 ‘주짓떼라’(jiujitera, 주짓수를 수련하는 여성)인지 알고 싶으면 팔 안쪽을 확인해보라. 주짓수 기술의 핵심은 상대의 움직임을 컨트롤하는 데 있고, 특히 허우적거리는 팔을 집중적으로 공략해야 한다. 그래서 팔 안쪽에 멍이 가실 날이 없다. 우리끼리 나누는 자조 어린 농담에 의하면 돈 주고 학대당하는 게 바로 주짓수다. 상대를 잘못 만나면 5~7분 남짓한 스파링이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지고, 그 시간이 끝나면 일종의 진공상태로 들어간다.
그러나 주짓수의 실체가 이뿐이라면, 고통은 일단 피하고 보는데다가 인내심이 없다시피 한 내가 이걸 계속할 이유가 없다. 애초에 왜 주짓수를 선택했던가? 코로나로 인해서 꽤 오랫동안 공백기를 갖고 최근에 다시 주짓수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나는 왜 그 많은 운동 가운데 주짓수인가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주짓수 그 자체보다 주짓수라는 환상을 좋아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강해지고 싶은 욕망이 있지 않은가.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후로 나는 강해지고 싶었다. 적어도 내 안전은 내가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강함은 내가 막연히 생각한 것 이상으로 복잡했다. 알고 보면 그건 물리적인 힘으로만 따질 수 없는, 정신, 용기, 위험을 알아차릴 수 있는 직관까지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기술 몇개를 익힌다고 될 일이 아니다.
강함에 관해서 곱씹을수록 강해지는 길은 멀게 느껴졌다. 나는 얼른 생각을 바꿔서, 늘 그렇듯 또 회의에 빠지기 전에 행동하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강인함의 이미지를 한데 뭉뚱그려놓은 주짓수라는 환상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렇게 시작된 주짓수 라이프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의외의 복병이 있었는데 도장에 갈 때마다 나를 골치 아프게 했던 문제, 즉 ‘도대체 누구와 파트너가 되느냐’는 거다. 팔다리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모르는 나와 파트너가 되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매트에는 남자들만 득실거리고 혹시라도 원치 않는 보모 노릇을 해야 할까 봐 모두 나를 외면했다. 이럴 때 유일한 구세주는 나와 처지가 비슷하거나 외로운 시기를 겪어본 주짓수 자매들뿐이다. 나는 그들에게 의존했다. 하지만 주짓떼라가 아무리 많아졌다고 해도 절대적인 수는 여전히 부족하고 자매가 한명도 없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그렇다고 주짓수를 관둘 수 없으므로 재빨리 차선책을 찾았다. 주짓수 자매의 대안은 50대 남성들로, 나보다 4~5년은 더 길게 수련했기 때문에 경험이 많고 무엇보다 여유가 넘쳤다. 한마디로 초보를 긍휼히 여길 줄 안다. 최고의 장점은 그들이 젊지 않다는 거다. 힘은 세지만 젊은 남자들과 다르게 금방 지친다.
이렇게 나는 갖은 노력을 기울이며 공백기를 포함해서 4년째 주짓수라는 환상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회의주의자답게 위기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주짓수가 지능적’이라는 환상이 하나 더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보조 환상이 버팀목처럼 몸체를 떠받든다. 오해할까 봐 덧붙이면, 주짓수가 특별히 어려운 운동이라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쉬운 운동이란 없다. 어떤 종목이든 일정한 수준 이상에 도달하려면 치열하고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나에게만큼은, 가장 쉬울 때조차도 어렵고 가장 단순할 때도 복잡한 게 주짓수였다. 지금도 혼란과 굴욕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그때마다 내 지능을 의심한다. 그러나 쉬움은 곧 따분함, 게으름이라고 여기는 나 같은 사람에게 어려움과 복잡함은 중요한 미덕이다. 그런 이유로 주짓수는 나를 상대로 학대를 멈추지 않고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아주 가끔 내가 완전히 절망하지 않을 정도로만 가능성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토록 원하던 강함에 한 발짝 다가간 것 같은 감각을 선사한다. 이 얼마나 사악한가.
“언제 주짓수 하러 같이 가요.” 엘이 나의 환상에 동참해주길 바랐다. 외로운 매트 위에 함께 있을 자매가 너무나 간절했다. 그러나 그는 선뜻 대답하지 않고 알 듯 말 듯 한 표정만 지었다.
양민영 <운동하는 여자>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