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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두질하듯’ 썰어 양념 없이 알알이 씹는 안주, 명란

등록 2022-07-23 11:00수정 2022-07-23 11:22

[ESC] 박찬일의 안주가 뭐라고

참기름·파 뿌리면 극강의 감칠맛
알알이 존재감 뽐내는 명란의 맛
대중화하며 요리법 다양해졌지만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노량진수산시장이 현재 신시장으로 이사하기 전 구시장에 숱하게 다니던 기억이 난다. 주차장 쪽에서 들어가면 조개와 기절 낙지를 파는 패류 도매상이 늘어서 있고, 겨울에는 그 안쪽에서 굴을 팔았다. 굴을 끼고 서쪽으로 가면 젓갈 골목을 지나게 된다. 사람들한테는 ‘장학금 주는 할머니네 그 집’ 뭐 이런 안내문을 붙인 집이 인기가 있었다. 젓갈 팔아서 번 돈을 대학에 희사하는 할머니의 며느리가 운영하던 젓갈집이었다. 우리 같은 장사꾼들은 일부러 다른 집들도 팔아주고 했는데, 다들 먹고살자고 나온 마당이니 유명하지 않은 집도 매상을 올려줘야 한다는 암묵의 룰 같은 게 있었다.

당시만 해도 젓갈은 대개 노점에 진열되어 있어서 어지간하게 짜지 않으면 못 견디겠다 싶은 시절이었다. 냉장고가 없는 건 아닌데, 악착같이 냉장을 해야 한다는 그런 태도 같은 건 없었다. 냉장고 없이 한반도에서 천년은 넘게 젓갈이 팔렸는데, 갑자기 그놈의 젓갈이 상할 리도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깨끗한 마트에서 단정하게 포장되어 냉장 코너에 진열된 젓갈 맛을 슬슬 보면서 시장의 젓갈 동네는 김장철에나 성시를 이루는 정도로 힘을 잃어갔다. 식당 판매용으로 생선을 사면, 이런저런 반찬거리도 사게 마련이었다. 식당에서 일하는 식구들이 밥은 먹어야 하고, 젓갈은 아주 만만한 반찬이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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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란은 작두질하듯 썰 것

도대체 젓갈을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는 몰라도 오징어젓 한 근을 사면 저울질이 후했다. 제일 싼 게 아마도 오징어젓이 아니었나 싶다. 이름도 희한한 ‘훔볼트 오징어’(독일의 유명한 학자 이름이다)로 만든, 하여튼 페루라는 저 먼 태평양 바다에서 잡아 기계로 팍팍 썰어 온갖 양념으로 뻘겋게 만든 젓갈이 우리가 아는 오징어젓갈이다. 백반집에서 나오는 그런 것들. 국산 오징어로는 값이 감당이 안 되어, 아버지가 부동산 보유세를 한 1억원씩 내는 집이 아니면 국산 오징어젓은 못 먹는 일이 되어버렸다(어디서 팔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그 젓갈 골목에서 크게 호사를 부릴 때가 있었는데 명란이었다. 요즘은 뭔 바람이 불었는지 인터넷에서도 명란을 팔고, 명란 스파게티도 있으며, 명란 바게트도 팔린다. 하지만 오랫동안 명란은 부잣집 반찬이었다. 하여튼 그 젓갈 골목에서 짜디짜고 시뻘건 명란을 한 근 사면 그날 직원 식사는 아주 성찬이 되곤 했다. 젓가락 끝으로 살짝 떼어내서 입에 넣으면, 천천히 흩어지던 짜고 감칠맛 강한 명란의 알들. 살아서 더 찬 북양어장에서 부화했다면 명태가 되었을.

명란은 다른 생선 알이 그렇듯이 알집이 두 개가 붙어 있는데, 한쪽은 좀 크고 다른 쪽은 작다. 두 알집 사이에 칼을 넣어 가르면 칼끝에 명란 알이 송송 맺힌다. 반찬 준비하다가 그 칼날을 훑어서 먹곤 했다. 미원과 설탕과 고춧가루와 아마도 또 무엇이 잔뜩 들어간, 명란 알이 부르는 건 밥이었다. 흰밥은 명란과 본디 같은 혈통이었던 것처럼 서로를 탐한다. 명란을 칼로 썰면 딱딱 떨어지는 법이 없다. 알집의 껍질이 칼을 물고 늘어져서 그냥 일반 재료 썰듯이 하면 한 점 집어 올렸을 때 지네 같은 다절 동물처럼 줄줄이 올라온다. 명란은, 도마에 놓고 아주 단호하게 작두질하듯 썰어야 한 몸의 알집들이 독립한다. 그 알집의 크기와 염도에 따라 밥을 먹는데, 알집이 크게 썰리면 두 술이고 작게 썰리면 한 술이다.

살기가 좋아진 건지, 명태가 더 많이 어획되는 건지 이제 명란은 부잣집 부엌 밖으로 나왔다. 명란은 아마도 부자들의 술안주였을 것이다. 동해안에서 잡혀, 소금 쳐서 도시로 팔려왔을 것이고, 번듯한 한옥집 부엌에서 찬이 되었을 것이다. 궁중요리라는 이름으로 팔리는 명란조치(명란찌개의 일종)도, 명란두붓국도 그런 집 상에 오르는 반찬이었을 것이다. 아아, 이제 일인당 소득이 3만달러가 넘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러시아 뱃사람들이 가져온 명란에 술을 마신다. 요새는 명란의 창백하고 푸른 핏줄이 보이도록 하얗게 양념한 백명란이라는 게 인기다. 옛날에는 소금을 한 20퍼센트쯤 쳐서 한여름에도 버틸 수 있었겠는데, 요즘은 염도 3도, 4도짜리 심심한 명란이 나온다. 돈만 좀 있다면 명란을 한 대접쯤 먹어줄 수도 있는 세상이다.

명란에 참기름을 치고 파를 뿌리는 게 가장 기본적인 안주다. 소주에 이만한 안주가 또 있을까. 그냥 냉장고에서 명란을 꺼내 도마에 나란히 놓고 칼날을 45도쯤 세워서 ‘작두질하듯’ 썰어 접시에 담는다. 참기름 몇 방울, 다진 파. 백명란엔 마늘은 사절이다. 순해서 마늘을 못 이긴다. 참기름 대신 올리브유와 크림치즈를 얹으면 화이트와인 안주다. 참기름+파+다진 단무지 조합도 있다. 소주병이 휙휙 쓰러진다. 오븐에 넣어 찜을 해볼 수도 있다. 명란을 서너개쯤 거칠게 다진다. 이때 껍질을 따로 발라내지 않는다. 어쩌면 명란은 껍질 씹는 맛이 3할쯤은 하는 재료다. 거기에 계란을 깨뜨려 한두개 섞고, 후추와 다진 마늘을 넣는다. 빵이나 식빵에 바르고 올리브유를 뿌려서 에어프라이어나 오븐에 굽는다. 빨리 꺼내면 촉촉한 명란이 반숙이 되고, 늦게 꺼내면 완숙이 되어 그게 또 다른 맛이 된다. 빵에 바르지 않고 내열용기에 넣어 오븐에 구워도 된다. 계란을 넣었으므로 마치 계란찜처럼 부푼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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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치캔이란 치트키를 만나면…

참치캔이랑 명란이 만나는 요리도 있다. 두 치트키가 더해지니 풍성하다. 참치캔에 들어 있는 기름은 절대 버리지 않는다. 그 기름은 참치를 더 맛있게 먹으라고 제조사가 넣어주는 서비스다. 참치살을 건져서 도마에서 대충 끊어준다. 다락다락 다져줄 필요는 없다. 거기에 명란 다진 것을 섞는다. 오이를 소금에 살짝 절여 물기를 짜서 같이 버무린다. 참치 기름을 넣고 마요네즈를 더해도 물론 좋다. 마요네즈는 기름과 식초가 다 들어 있는 재료다. 어디든 뿌리면 제 몫을 한다. 오이처럼 씹히는 맛이 있는 채소가 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삶은 감자나 당근, 셀러리 같은 것들. 채소가 들어갔으니 까나리젓갈도 살짝 뿌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냥 명란을 잘라서 껍질이 잘근거리게 어금니로 씹으면서 본디 양념한 사람의 의도대로 그 자체를 안주로 먹는 게 물론 최고라고 생각한다. 원래 트러플이며 캐비아며 하는 것들은 양념이나 요리를 하지 않는 게 최선이다. 한 획으로 그은 걸작 서예에 자꾸 개칠을 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고 보니 앞에 쓴 거친 레시피는 다 개칠이다.

박찬일(요리사 겸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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