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권은중의 생활와인
브륀들마이어 그뤼너 벨트리너 캄프탈 테라센
누구에게나 일상이 있다. 그렇지만 일상에서 우리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건 생각만큼 많지 않다. 공부도, 직업도, 사랑도 뜻대로 안 된다. 나이가 들수록,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은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는 걸 알려주는 고대 그리스 비극에 소름이 돋는 이유다.
하지만 일상의 중력이 잠깐 멈추는 순간이 있다. 그건 끼니다. 우리 운명과 달리 끼니는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시간과 비용이란 단서가 붙는다. 그렇지만 끼니는 누구에게는 단순한 열량을 섭취하는 경제 행위일 수 있지만 누구에게는 생활의 중력에서 벗어나는 구원의 순간이다. 와인은 끼니의 구원을 가능케 하는 마법이다. 나는 주로 화이트와인으로 식탁에 주문을 건다. 화이트에는 레드에는 없는 사랑스러운 책임감이 있다. 책임감은 여러 갈래에서 발휘된다.
첫째, 음식과의 매칭이다. 화이트와인은 당도와 산도라는 놀라운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덕분에 많은 음식을 포용한다. 심지어 고기마저도 끌어안는다. 둘째, 화이트는 어떤 자리도 화사하게 만든다. 레드처럼 까다롭지 않고 차갑게만 하면 맥주처럼 안주 없이도 마실 수 있다. 브런치, 집들이, 피크닉 어떤 자리에나 어울리는 친화력도 갑이다. 마지막으로, 암약하는 화이트 예찬론자들을 만나게 해준다. 화이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과시보다는 일상의 소소함으로 와인을 대한다. 화이트처럼 내성적이지만 우리는 금세 동지가 된다.
화이트를 예찬하다 알게 된 선배가 있다. 의학을 전공하기 위해 유럽 유학을 갔다가 와인에 빠졌고 결국 소믈리에가 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이 선배가 얼마 전 오스트리아에 여행을 갔다가 나와 마시겠다고 그뤼너 벨트리너 와인을 구입해 귀국했다. 하지만 번번이 서로 일정이 맞지 않아 만나지 못했다. 선배는 주변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와인을 잘 보관했고 드디어 장맛비가 퍼붓던 지난 6월 말 이 와인을 함께 마셨다.
오스트리아 토착 품종인 그뤼너 벨트리너로 만든 화이트는 향과 맛은 리슬링, 소비뇽 블랑과 비슷하면서도 산도와 당도는 샴페인을 연상케 할 만큼 기품 있었다. 알프스의 눈 덮인 봉우리처럼 차고 맑고 단단했다. 이 포도는 보통 석회암 토양이 많은 유럽 다른 나라와 달리 화강암 토양에서 자란다. 와이너리인 브륀들마이어는 이 화강암을 깎아 만든 계단식 밭에서 유기농으로 이 포도를 재배한다. 지금까지 마셔온 와인과 다른 에너지는 이런 토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와인 가운데 가장 맛있는 와인은 ‘남이 사준 와인’이라고 한다. 대체로 와인 가격이 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날 깨달았다. 진짜 맛있는 와인은 누군가 여행을 가서 나를 떠올리고 현지에서 사서 여행가방에 넣어 가지고 온 와인이란 걸. 와인은 혼자 마시기에는 양이 많아 늘 누구와 함께해야 한다. 그래서 와인은 자연스럽게 스토리를 양산한다. 그런 스토리가 나의 끼니뿐 아니라 나의 삶을 환하게 만든다.
권은중 음식칼럼니스트
브륀들마이어 그뤼너 벨트리너 캄프탈 테라센
오스트리아 토착 품종인 그뤼너 벨트리너로 만든 화이트 와인은 향과 맛은 리슬링이나 소비뇽 블랑과 비슷하고 산도와 당도는 샴페인을 연상케 한다. 권은중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