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간 기다렸던 <김광석 다시 부르기> 엘피 대신 어느 날 시디(CD)가 나를 찾아왔다. 헌책방에서 행운처럼 짠내 구입한 <김광석 다시 부르기1>, <딥 퍼플-솔저 오브 포춘> 등 시디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이사를 하다 보면 부부 싸움은 필수다. 6월22일 휴가를 내고 이삿짐을 싸던 우리는 충돌했다. 무엇을 버려야 할지,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 서로의 기준이 달랐다. 이번엔 기왓장이다. 아차산, 북한산, 황룡사 등을 다니며 무늬와 색깔에 취해 모은 기와 파편을 두고 “이런 먼지 쌓인 걸 꼭 가져가야 하냐”는 아내의 말에 시쳇말로 빈정 상했다. 한동안 장식장 밑에 숨겨놓은 것도 서러운데… 화가 났다.
이삿짐 싸기를 중단하고 나만의 힐링 성지를 찾아 나섰다. 아차산 인근 한 신학대학, 워커힐아파트 옆 풍치 좋은 이곳은 화가 끓어오를 때마다 찾아가 마음을 달래는 곳이다. 캠퍼스 곳곳에 풍성하게 달린 노란 살구는 큰 위안을 안겨준다.
2013년 이 동네로 이사 온 뒤, 넉넉히 200번은 지나쳤을 골목을 지났다. 그런데 한번도 들른 적 없는 헌책방 앞을 지나가다 시디(CD) 한장이 눈에 들어왔다. 먼지 잔뜩 뒤집어쓴 채, 빛바랜 모습으로 1m쯤 되는 높이로 쌓인 시디 더미에서 <김광석 다시 부르기 1>이 선명하게 내 눈에 꽂혔다.
가객 김광석의 음반은 엘피(LP)든 시디든 수집가들에겐 귀한 대접을 받는 아이템이다. 시적인 가사, 은근히 가슴을 후벼 파는 음색으로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았지만, 1996년 그가 생을 마감한 뒤(이상호 <고발뉴스> 기자는 타살설을 제기해, 김광석씨 부인에게 명예훼손 혐의로 피소당해 재판에 넘겨질 정도로 그의 죽음은 여전한 의문이자, 일종의 신화였다) 그의 노래가 담긴 엘피는 금값이 됐다. 특히 서울 대학로 소극장에서 공연한 음원을 편곡해 1993년 킹레코드사와 서울음반이 잇따라 발매한 리메이크 앨범 <김광석 다시부르기 1, 2> 엘피는 장당 50만원을 훌쩍 넘어선다. 1993년 함께 제작한 같은 제목의 시디는 말할 것도 없고, 2006년과 2012년 재발매한 리마스터 시디 2장 한 세트가 ‘11번가’ 등 인터넷 쇼핑몰에서 13만~14만원에 팔린다.
짠내 수집가로 지난 15년 동안 <김광석 다시 부르기 1, 2> 엘피가 나를 찾아오기를 학수고대했다. 실물은 딱 두번 봤다. 하지만 장당 60만원, 너무 고가를 요구해 구매는 엄두도 못 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시디라도 구해보려 했지만 이 또한 1993년 엘피와 동시에 발매한 실물을 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지난 9년 동안 수없이 거닐던 그 골목길, 헌책방에서 매의 눈도 아닌데 스쳐 가는 길에 김광석 시디만 도드라져 다가왔다. 역시 모든 물건엔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런데 주인장은 가게 앞 길가에 물건을 쌓아둔 채 문을 걸어두고 어딘가 갔다. 오후에 다시 들를 생각을 했지만 그사이 누군가 가져갈까 은근 근심됐다. 그렇다고 무작정 가져올 수 없는 일, 그건 절도다. 결국 시디의 제목이 안 보이는 쪽으로 돌려놓고 돌아오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오후에 다시 헌책방에 들렀다. 안도했다. 아직도 있었다. 얼마냐고 묻자 주인장이 답했다. “내가 봉사하는 마음으로 신학대학교 앞에서 헌책을 팔고 있는 거라, 시디는 그냥 놔둔 거야. 장당 1천원에 가져가세요.” 대박이다. 나는 1m 높이로 쌓여 있는 시디 더미에서 <김광석 다시 부르기 1>(킹레코드), <패닉―아무도>(신촌뮤직) 등 시디 3장을 골랐다. 감사의 마음으로 헌책방을 나서는데, 주인장이 말씀하신다. “창고에도 시디 많은데, 언제 시간 내서 한번 와요.” “아아 네, 지금 아내가 도로 옆에 임시 주차 중이라 오늘은 어렵고, 주말쯤 다시 올게요.”
주말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하룻밤을 지낸 뒤 곧바로 달려갔다. 주인장은 주섬주섬 상자 하나를 내왔다. 영어 학습용 시디, 설교 시디, 게임 시디 틈에서 <산울림 베스트 1>(서울음반)을 찾았다. 가슴이 떨렸다.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아니 벌써’, ‘소녀’ 등 산울림 명곡이 담겨 있었다. <이기찬―natural>(서울음반)의 시디도 있었다. 한 상자를 다 뒤지고 나자 주인장은 또 다른 상자를 가져왔다. “많이 좀 골라 보세요. 그래야 나도 수지가 맞지. 내가 주업이 헌책 파는 거라 시디는 1천원에 거저 주는 거야. 다른 데서 최소 1만원씩은 받을 텐데.”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르고 골랐다. ‘마법의 성’이 수록된 <더 클래식 1집>(서울음반)을 비롯해 <김건모 6집>(도레미레코드사) <디제이 디오시―더 라이프…디오시 블루스 5%> 등 요즘 찾기 힘든 가요 시디가 쏟아져 나왔다. “그것밖에 없어? 그럼 이걸 봐.” 세번째 상자를 갖고 오신다. 하드록의 전설 딥 퍼플이 1974년 발표한 <딥 퍼플―솔저 오브 포춘>(이엠아이)과 프로그레시브 록의 지존으로 평가받는 핑크 플로이드가 1979년 발표한 <핑크 플로이드―더 월>(이엠아이)도 있었다. 그날 모두 30장의 시디를 골랐다. 주인장은 덤으로 2장 더 골라 가라고 했다. 고민했다. 그 시절을 잘 추억할 시디가 뭘까? 결국 누군가 녹음한 뒤 만년필, 볼펜으로 제목을 써넣은 <보아 싱글 1집> <체리필터 2집>을 택했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직접 시디에 녹음해 듣거나 선물하는 게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다. 뜻밖의 득템에 기분이 날아갈 듯한데, 필사한 제목에선 훈훈한 온기마저 느껴졌다.
폭우 속에 힘겹게 이사를 마쳤다. 그리고 음반을 꺼내 듣기 시작했다. 대부분 깔끔했다. 그런데 빈 재킷(케이스)만 있는 경우도 있었다. <쿨 2집>, <디제이 디오시> 등 4장은 재킷 속에 내용물인 시디가 없었다. <패닉>은 그나마 다른 재킷에 음반이 들어 있어 제짝을 찾아 맞췄다. 순간, 잊고 있던 짠내 수집에서 경계해야 할 교훈이 떠올랐다. ‘귀한 음반을 얻었다고 들떠, 케이스만 보고 무작정 사들일 경우 낭패를 본다는 걸 깜박했네.’ ‘벚꽃 엔딩’을 부른 버스커버스커의 음반을 고양시 한 중고 상점에서 발견해 기쁜 나머지 그냥 들고 왔는데 집에 와 보니 내용물이 전혀 달랐던 경험을 계기로 마음에 새기고 새겼는데, 이번에도 득템의 물욕에 눈이 멀어 그만 방심하고 말았다.
아내는 헌책방 주인장에게 얘기하자 했다. 모두 4장이 비었으니 단순 계산으로 4천원을 돌려받을 수 있다. 하지만 ‘낙장불입’, 이른바 환불 불가를 원칙 삼은 중고물품 거래의 상도의에도 어긋나고, 이미 주인장이 보유한 세 상자 속에서 숨은 보석을 무더기로 얻었는데 욕심이 과하면 안 된다. 짠내 수집은 원래 그런 것이다. 남들은 가치를 모르는 것에, 때로는 파는 이조차 그 진가를 모르는 걸 살 때 희열을 느끼고, 이미 귀한 물건을 여럿 손에 넣었으니 이만 족한 줄 알고 돌아서면 된다.
신승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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