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음식은 안주가 된다, 고 생각하고 마셨다. 그 때문에 아마도 이 연재에서 괴식의 비율이 높았던 것 같다. 물론 나도 삼겹살에, 해물파전에, 오징어볶음에 마시는 술이 제일 좋다. 소주와 먹는 김치찌개를 꺾을 안주가 어디 있겠나. 기왕 안주 얘기를 하는 김에 별다른 것, 나의 악취미, 괴식 취향을 드러내고 싶었다. 술안주의 지평을 넓힌 공로로 술집주인연대(이런 게 있을 리 없다)로부터 상을 받아도 될 일이었다. 요즘은 크로스오버에 퓨전의 시대다. 뭐든지 섞고 합친다. 내가 숨겨둔, 썩 괜찮은 안주를 오늘 써보려고 한다.
1 단팥빵에 청하 같은 저렴한 청주가 잘 맞는다. 왜 그런지 모른다. 하여간 잘 맞는다.(고향이 같아서?) 단팥빵을 전자레인지로 돌려서 차가운 버터 올려 먹으면 더 맛있다.
2 카페라테에 소주가 잘 맞는다. 소금을 좀 치면 더 낫다. 이건 입가심 안주로 꼭 캔커피(반드시 레쓰비만 마셨다. 이유는 모른다)를 마시는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술자리에 늦게 온 친구가 ○○벅스의 카페라테를 들고 와, 그걸 마시더니 “괜찮네” 해서 알게 됐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데, 그다지 개운하지 않은 희석식 소주의 잡맛을 지우기 위한 용도라고 의심하고 있다. 토마토주스나 오렌지주스 같은 걸 안주로 먹는 사람도 대개는 그런 이유에서다.
3 참치캔은 그냥 먹어도 좋지만, 무조건 마요네즈를 두 숟갈 넣어야 한다. 다진 파를 추가하면 막강해진다.
4 고깃집에서 공짜로 주는 채소 스틱(당근, 오이, 셀러리 같은 거)에는 막장이 딸려 나오는데, 고기 찍어 먹는 참기름을 쓱 부어서 아작아작 씹으면 훨씬 좋다.
5 유서 깊은 냉면집에서 수육이니 뭐니 하는 안주보다 실은 비빔냉면이 더 낫다. 평양냉면집에서 원수 취급당하는 가위를 달라고 해서 잘라준 후 숟가락으로 퍼먹으면 제격이다. 두 사람당 비빔냉면 한 그릇 정도가 적당하다. 토핑인 삶은 달걀도 같이 으깨는 게 포인트. 매운 비빔냉면 안주 한 숟갈에 입이 매우면 맥주를 한 잔, 이렇게 마신다. 물론 소주도 좋다.
6 중국집에서 대파를 달라고 해서 안주로 먹는다는 얘기는 이미 해드렸다. 얼마 전에는 화교가 하는 중국집에서 대파를 달랬더니, 그냥 한 줄기를 턱, 내주는 게 아닌가. 진짜 옛날 한국에 온 산둥성 화교들처럼 한 손에 그걸 쥐고 춘장 찍어가며 싸구려 고량주를 마셨다. 100년 전 조선에 온 화교 노동자들은 그렇게 밥반찬으로 먹었다고 한다.
7 프로슈토를 몇 점 구했으면 그냥 먹지 말고 딸기나 참외에 싸서 먹어라(대파나 쪽파에 마요네즈를 발라 싸도 어울림). 와인이나 에일 맥주에 좋다. 프로슈토에는 원래 멜론이다. 이탈리아의 여름 별미. 이것은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절인 것과 단 것을 섞는 게 그리스의 미식이었다. 배에 치즈를 곁들이는 방식은 중세에 기원을 두고 있다. 한국에서는 흔히 사과를 쓴다.
8 명란에는 크림치즈와 오이가 최고. 이때 고춧가루를 살짝 뿌리면 더 맛있다.
9 부대찌개에 넣는 베이크드빈 통조림(엄청 싸다)에 고추장을 섞어 따뜻하게 데우면 소주, 맥주에 맛있다. 버터빈이라고 하는 강낭콩도 통조림으로 들어오는데, 이건 고추장보다는 물을 다 따라내고 데운 후 간장과 올리브유를 살짝 뿌려 먹는 게 술안주로 좋다. 가루 치즈가 있으면 뿌려 낼 것. 근사해진다.
10 싸구려 홍어회를 인터넷으로 사서 그냥 먹지 말고 오징어젓갈 올려서 날김에 싸 먹으면 궁합 최고.
11 ‘3분 카레’를 안주로 먹을 때 비엔나소시지를 같이 넣어 데우면 최고다.
12 동치미에 참기름 한 방울! 소주 드세요. 날카로운 동치미가 부드러워져서 안주로 좋다. 물론 절대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다. 동치미에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는 사람들이 좀 많은가.
13 단무지를 참기름 넣은 초장에 찍어 먹으면 술안주로 좋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자고로 짠 절임은 술안주로 좋은 법인데 단무지도 예외는 아니다. 문제는 그냥 단무지는 대개 인공감미료 맛이 거슬린다는 것. 초장이 가려주기 때문인 것 같다.
14 인스턴트 어묵탕을 안주로 할 때는 배춧잎을 몇 장 저며 넣어라. 격이 달라진다.
15 냉장고에 굴러다니는 어묵은 뜨거운 물로 데친 후 물기를 닦아 아무것도 하지 말고 겨자를 찍어 안주 하면 좋다.
16 접시에 달걀노른자만 세 개쯤 얹고, 랩으로 덮어 전자레인지에 1분 돌린 후 김부각이랑(그냥 부순 양념김도 좋다) 간장을 뿌려서 밥에다 얹어 내면 꽤 그럴듯한 안주가 된다.
17 배달해온 떡볶이에는 막 부친 계란프라이를 얹으면 무적의 안주. 하기야 귀찮아서 시킨 떡볶이에 요리를 더하는 건 오바야 오바.
물론 어떤 음식에 뭘 더한다는 건 의미 없다는 사람도 많다. 재료가 가진 원형의 맛이 더 좋다는 뜻이겠다. 그럴 수도 있다. 동의한다. 전통적인 음식들이 안주로 더 좋을 수 있다. 그건 오랜 시간 동안 검증된 것이다. 계란으로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것보다 계란찜이 더 환영받는다. 그래도 그 계란찜도 처음 선보일 때는 다 무명이었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다. 인생도, 안주도.
댓글로 무수한 괴식 안주가 주렁주렁 달리면 좋겠다. 실은, 오늘 소개할 안주는 김치죽이었다. 옛날, 김장이 다 되어갈 때 찬밥 말아서 멸치랑 콩나물이나 넣고 미원 솔솔 뿌려서 끓여 먹던 김치죽. 이걸 예술적으로 하는 집을 정읍에서 발견했다. 다이네막창이라는 집. 막창과 갈매기살 구이가 전문인데, 이 김치죽이 더 맛있다는 소문의 집이었다. 과연 콩나물에 계란 풀고 김 얹어 끓이는 김치죽이 기막혔다. 소주를 김치죽에 먹다니. 이걸 먹고 겨울과 헤어진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봄이라는데 아직 봄이 아닌 많은 사람들의 속을 데워줄 안주가 아직도 필요한 세상이구나 싶었다. 이젠 정말 겨울과 작별할 시간이다.(최근 강원도에 눈이 펑펑 왔더라!)
박찬일(요리사 겸 음식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