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의 한 밭에 유채꽃이 가득 피어 봄의 정취를 뿜어내는 모습. 연합뉴스
지금 제주에는 유명한 두 개의 벽이 있다. 하나는 설경이 아름다운 한라산 남벽, 다른 하나는 제주시 탑동의 ‘디벽’이다. 디벽은 알파벳 d자가 그려진 회색 벽인데 이 앞에서 성별불문 ‘꾸안꾸’(안 꾸민 듯 꾸민) 스타일로 단장한 20~30대들이 독사진을 찍는 것이 인스타그램에서 큰 유행이다.
제주 원도심길, 관덕로. 맛집들과 빈티지 가게, 카페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이유진 기자
탑동은 이제 친환경과 지역화의 뜻을 가진 글로벌 브랜드와 한국 대기업, 제주의 신진 지역 브랜드가 공존하는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좋은 디자인과 재활용의 융합을 선보여온 브랜드 디앤디파트먼트(이하 디앤디), 업사이클링 가방 브랜드 프라이탁, 코오롱스포츠의 친환경 매장 ‘솟솟 리버스’, 제주 브루어리에서 100% 생산하는 수제맥줏집 맥파이, 탑동 바다 끝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끄티 탑동’까지. 이와 함께 최근엔 제주시 원도심(일도1동, 삼도2동, 건입동 일원)도 재발견되고 있다. 엠제트(MZ)세대의 젊은 발자국이 찍히고 있는 제주 원도심의 핫플레이스를 소개한다.
디앤디파트먼트 제주 건물 벽에 적힌 d자 앞에서 젊은이들이 줄을 서서 사진을 찍고 있다. 이유진 기자
제주시 탑동 일대는 사실은 거대한 매립지다. 젊어서 남편을 잃은 ‘청상과부’가 많아 ‘살기’(殺氣)를 막기 위해 탑을 짓고 제를 지내면서 ‘탑동’이란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검고 반질반질한 ‘먹돌’이 해안가에 쫙 깔려 장관을 이뤘다는 이곳은 간조 때 주민들이 해산물을 채집하는 바릇잡이로 유명했다. 거센 반대운동에도 개발은 이뤄졌고 1985년부터 공유수면이 매립되기 시작해 1991년 공사가 끝났고 이후 호텔과 마트가 들어섰다.
1990년대 번화가였던 탑동은 2000년 초 구도심 상권이 쇠락하며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변화의 신호탄은 2005년 문을 닫은 탑동시네마가 2014년 아라리오뮤지엄으로 모습을 바꾸어 개관하면서부터였다. 2020년 이후 친환경과 감각적인 이미지를 내세운 매장들이 생겼고 젊은이들이 몰려들면서 탑동은 ‘핫플’로 거듭났다.
아라리오제주가 직영하는 ABC베이커리와 코오롱스포츠의 ‘솟솟 리버스’. 이유진 기자
지난달 10일 문을 연 코오롱스포츠의 ‘솟솟 리버스’ 개장은 이 오래된 구도심의 회생을 확인하는 중간점검표와도 같았다.
‘뺄셈의 미학’을 선보이는 일본의 유명 건축가 나가사카 조(스키마타 건축사무소)가 설계한 이 건물은 오랜 구축의 벽에 코오롱스포츠의 전통적인 아이덴티티인 상록수 로고를 그려 넣었다. 노출 콘크리트 벽을 그대로 두고 폐기물이 덜 나오는 쪽으로 마감재를 최소화했으며 매장 내 테이블, 선반, 의자도 제주에서 수거한 해양폐기물을 활용했다.
매장에는 코오롱스포츠가 100% 자체 업사이클링한 감각적인 디자인의 제품이 진열돼 있다. 옷을 잘라 만든 가방, 양말을 재활용한 텀블러 커버, 의류 등을 팔며 아웃도어 활동을 위한 캠핑용 테이블, 의자, 비옷, 등산 스틱, 아이젠, 스패츠 등을 저렴한 가격(5000원 정도)에 빌려주기도 한다.
코오롱FnC의 최고지속가능성책임자(CSO)이자 코오롱스포츠 총괄 디렉터 한경애 전무는 “자연으로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프로젝트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솟솟 리버스 제주는 앞으로 50년을 환경과 함께하겠다는 선언 같은 프로젝트”라고 밝혔다. 문을 연 지 한달 남짓이지만 매장에는 제주의 인플루언서와 젊은 소비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탑동의 중심, 아라리오뮤지엄의 옆 건물인 디앤디(d-jeju.arario.com)는 호텔 ‘디룸’과 업사이클링 용품과 가구를 파는 스토어, 식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 유명 디자이너이자 경영자 나가오카 겐메이가 2000년 설립한 디앤디는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디자인의 제품을 파는 백화점이란 의미를 담았다.
‘호텔 같지 않은 호텔’이라는 콘셉트를 가진 디룸 리셉션에 들어서니 친구나 친척 집에 놀러 온 것 같은 편안함이 느껴졌다. 1인용 객실은 다소 좁고 답답하지만 디자이너 루이스 폴센의 펜던트 조명, 프리츠 한센의 빈티지 의자가 빈틈없이 완벽한 미드센추리 스타일을 연출하고 있었다. 거대한 하나의 쇼룸이랄까, 객실의 모든 가구, 수건, 휴대용 조명등까지 비치된 제품 모두 스토어에서 구입할 수 있다. 복도 겸 거실 같은 공용 휴식공간과 객실의 모든 가구는 중고 빈티지. 객실료는 1인실 16만원, 2인실 30만~37만원(연회비 5만원)으로 다소 높지만 특별한 체험을 추구하는 젊은층의 선택을 받고 있다.
디룸 내부. 1인용 객실은 다소 좁고 답답하지만 디자이너 루이스 폴센의 펜던트 조명, 프리츠 한센의 빈티지 의자가 빈틈없이 완벽한 미드센추리 스타일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유진 기자
디앤디 양쪽 건물에는 아침부터 젊은이들이 줄을 서서 입장하는 프라이탁 제주 매장과 자전거숍, 그리고 유명한 수제맥줏집 맥파이가 있다. 탑동의 끄트머리, 건입동 서부두 낡은 건물에는 지난 1월 도시재생 스타트업 알티비피(RTBP)얼라이언스가 연 복합문화공간 ‘끄티 탑동’이 자리잡았다. 바로 옆 옛 제주 조선소 건물 외벽에는 구헌주 작가의 커다란 그라피티가 요즘 감성을 자극한다. 2층 카페에서 툭 터진 바다를 바라보며 음료를 마실 수도 있다.
원도심을 가로지르는 산지천 주변에 위치한 ‘올댓제주’(인스타그램 @all_that_jeju_rey)는 제주가 고향인 김경근 셰프의 비스트로 식당으로 2014년 문을 열었다. 1인 고객을 환대하며 제주 제철재료 로컬푸드를 이용한 음식과 다양한 사케, 와인, 맥주, 토종술 등을 판다. 제주 돼지와 소고기로 만든 멘치가스 고로케는 풍미가 일품. 김 셰프는 “코로나 영향으로 영업시간이 제한되어 타격이 크지만 그래도 꾸준한 단골 덕에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탑동의 유명 이자카야 ‘미친 부엌’ 공건아 오너셰프가 인근에 최근 문을 연 우동 사케바 ‘미친주면소’(@mechinudon)도 젊은이들의 선택을 받고 있다.
조선시대 병사훈련장이었던 관덕정. 관덕정 옆 제주목 관아는 공간이 넓고 아름다워 입장료를 받지 말고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개방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이유진 기자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원도심, 관덕로의 젊은 감각도 예사롭지 않다.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길인 남문로로 통하는 삼도2동의 관덕로6길 입구에 위치한 텐저린맨션(@tangerine_mansion)은 오래된 호텔을 복합문화공간으로 재단장한 곳이다. 제주 여행객, 시민들이 함께 어울리는 문화의 ‘용광로’ 구실을 하려는 시도로 탄생했다. 1층에는 각종 의류, 가방, 소품과 향수 등 젊은 감각의 디자인 상품을 전시·판매한다. 2층 카페 릿브레드는 창밖으로 제주 원도심의 풍경이 펼쳐지는데 ‘인생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건물 뒤쪽 관덕로4길 골목에는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독립책방인 이후북스 제주점(@jeju_afterbooks)과 클래식문구사(@classic_stationery) 등 레트로한 작은 상점들이 자리 잡았다. 인근 삼도2동 문화예술의 거리(관덕로6길)에서는 작가들의 도예작품을 구경하거나 구입할 수 있다. (가마앤조이, 064-752-2750) 아름다운 종소리와 고딕양식으로 유명한 중앙성당(관덕로8길)을 구경하고 나선 길의 끝에 이르면 젊은이들이 줄을 서는 우뭇가사리 푸딩집 ‘우무’(@jeju.umu)가 있고, 연예인들이 즐겨 찾는 빈티지 가게(에브리바디 빈티지, @everybody.vintage)들이 즐비하다.
연예인들의 발걸음으로 유명한 빈티지 옷가게 ‘에브리바디빈티지’에서 바라본 관덕로 모습.
칠성로 쇼핑타운 내 오각집(관덕로15길, @ogakjib)은 원도심 도보 여행의 거점으로 삼을 만하다. 인근 동문시장 등에서 음식을 사 와서 시즌 와인이나 맥주 등과 함께 먹을 수도 있다. 플리마켓과 체험행사, 공연이 시시때때로 열리는데 아티스트가 무대에 등장해 깜짝 공연을 펼치기도 한다.
관덕로의 옛 제주 행정관청인 제주목 관아, 군사훈련지인 관덕정(국가지정 보물 제322호)은 건물과 정원이 아름다워 입장료를 없애고 공공의 휴식·문화공간으로 만들자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 한국생태관광협회 고제량 공동대표는 “관덕정은 4·3사건의 도화선이 된 1947년 삼일절 기념행사가 열린 현장이었다. 아름드리 녹나무를 품은 제주목 관아와 붉은 열매의 먼나무, 워싱턴야자 같은 가로수들을 만나며 도보로 원도심을 즐기기를 권한다”고 말했다.
원도심 중심인 칠성로 입구에 자리 잡은 ‘카페 심지’는 제주민들 사이에서 ‘그때 그 다방’으로 유명하다. 2019년 문을 연 카페 심지의 김경은 대표는 “1976년부터 1996년까지 심지다방은 제주 도심 문화의 산실이었다. 디제이 음악다방으로 청춘들의 핫플레이스였고 경제, 문화의 집결지이자 제주의 명동이었다”고 말했다. 이곳의 수제차, 주인장이 쪄낸 부드러운 빵에다 끼운 따끈한 핫도그가 노곤한 마음을 달래준다.
원도심의 재생을 돕는 제주특별자치도 도시재생지원센터 양민구 사무국장은 “지대를 낮춰 문화공간을 유치할 수 있게 한 건물주, 젊은 브랜드 기획자, 사업가 들의 노력으로 원도심이 점점 활기를 띠고 있다. 앞으로 좀 더 많은 이들이 제주 원도심의 매력을 경험해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카페 심지의 김경은 대표. 이곳은 1970~80년대 제주 문화의 산실이었다.
한짓골과 남문을 오가는 남문샛길에는 작은 돌담들이 이어져 있다. 이유진 기자
제주/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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