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에 떡국을 먹었다. 비건이 어떻게 떡국을 먹느냐고? (연인에게 전수받은) 내 비법을 공개한다. 무랑 표고버섯, 다시마를 넣고 채수를 끓인다. 그렇게 만든 채수에 떡, 당근, 애호박, 표고버섯을 넣고 전통간장으로 간을 한다. 마지막으로 대파 넣고, 후추 뿌리고, 김 고명 얹으면 환상적인 비건 떡국 완성! 비건도 한살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설날이 다 지나고 나서야 알려드려 죄송합니다.
이렇게 만든 떡국을 설날에 동생과 함께 먹었다. 채식을 지향하는 동생은 이번 설 연휴 동안 떡국을 총 세번 먹었는데 그중 나와 함께 먹은 비건 떡국이 가장 맛있다고 단언했다. 물론 처음에는 형을 배려하는 동생의 선의의 거짓말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그릇을 비우는 동생을 보며 의심을 거둘 수 있었다.
지금 글을 읽으며 비건 떡국의 맛을 의심하는 당신, 직접 만들어 먹어보라. 변화는 행동에서부터 시작한다. 의심이 든다면 집에서 채수로 국을 만들어보면 해결되는 일이다. 만들어 먹을 여유가 없는 독자라면 서울역 근처 ‘다옴○수’에 가서 먹어보길 추천한다. 한식에 대한 고정관념과 육수에 대한 맹신이 사라질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세상 모든 국에 멸치가 (그리고 예외적으로는 멸치 대신 소뼈가) 필히 들어갔다 나와야 하는 줄 알았다. 먹어보니 멸치와 소뼈 없이 채소만으로도 깊은 맛이 가능하더라. 아니, 맛있는 채수는 육수를 가히 능가한다. 사찰에서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공공연한 비밀이다.
생각해보면 한식 요리를 채식으로 바꾸기는 쉽다. 육수를 채수로 바꾸고, 육류를 빼고 채소를 넣으면 된다. 낙지볶음에 낙지 빼고 버섯을 넣으면 요리의 이름과 고통의 총량은 바뀔지언정 양념과 요리의 맛은 바뀌지 않는다(서울 성북동에는 이렇게 만들어주는 곳이 있다). 이처럼 수상하게 간단한 등가교환이 가능한 이유는 한국이 산에 둘러싸여 나물과 채소가 많고 한때 불교가 국교였던 역사적 채식 강국이기 때문이다.
서울은 요새 매주 새롭게 연 비건 식당이 너무 많아서 다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다. 지도 앱을 켜보면 비건 세상이 벌써 도래한 것만 같다. 하지만 새로운 비건 식당 중 한식당은 아직 찾기 어렵다. 게다가 가격이 높고 생소한 요리가 많아 비거니즘에 대한 하나의 고정관념을 견고히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비거니즘을 ‘새롭고 핫한’ 반짝 트렌드나 환경·사회·지배구조(ESG)와 그린워싱의 도구로 보는 대기업도 이 고정관념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식물성 대체 재료를 사용하지만 정작 유제품이나 논비건 재료가 들어가 비건이 소비할 수 없는 제품이 이따금 출시되면 한숨부터 나온다.
나는 고급스러운 비거니즘에 저항한다. 내 통장이 아파해서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하게는 비거니즘이 엘리트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거니즘은 접근하기 쉬워야 한다. 그것이 내가 비거니즘에 대해 쓰는 이유다. 비건 세상은 내가 처음 보는 비건 요리가 많아질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래 즐겨 먹던 음식이 비건이 될 때 찾아오는 것이다.
비건이 이사한 날 집 근처에서 짜장면을 시켜 먹고, 해장할 때 콩나물국밥을 먹는 세상을 꿈꿔본다.
홍성환(비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