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ESC] 초코와 포트와인 ‘저세상 궁합’

등록 2021-12-24 10:59수정 2021-12-24 11:21

임승수의 레드
달달한 초콜릿케이크 씻어주는 달콤한 개운함 그라함 포트와인
달달한 초콜릿을 그보다 한층 달콤한 와인으로 씻어내는 개운함이라니! 그 비밀은 역시 포트와인의 상큼한 신맛과 달큰한 알코올에 있다.
달달한 초콜릿을 그보다 한층 달콤한 와인으로 씻어내는 개운함이라니! 그 비밀은 역시 포트와인의 상큼한 신맛과 달큰한 알코올에 있다.

소중한 사람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은, 보는 이에게 따뜻한 행복감을 준다. 그것은 종종 감동적인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진하고 알싸한 감정을 자아내는데, 연말이라는 특정한 시기가 되면 유독 그 증상이 증폭되는 느낌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이라는 게 그 옛적 로마 황제가 임의로 정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전세계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 이 스케줄에 맞춰 아련한 감상에 빠지는 걸 보면, 시대를 뛰어넘는 권력의 작동에 새삼 놀라게 된다. 만약 서세동점이 아닌 동세서점이었다면 여전히 중국 황제의 역법을 따랐으려나?

아무튼 로마 황제가 정한 마감일이 다가오니 자연스럽게 케이크가 떠오른다. 그것도 제법 근사한 초콜릿케이크 말이다. 아내가 워낙 ‘초코 초코’ 하며 꾸덕꾸덕한 케이크를 탐하는지라, 소중한 사람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에 인터넷 인맥을 동원해 정보를 취합했다. 도출된 결론은 투썸플레이스의 ‘클래식 가토 쇼콜라’였다. 와인은 자연스럽게 달달한 ‘포트와인’ 쪽으로 방향이 잡혔는데, 초콜릿과의 찰떡궁합이 워낙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말 분위기도 낼 겸 5만원대의 좋은 가격으로 ‘그레이엄(그라함) 10년 토니 포트’를 구했다.

케이크를 준비하고 와인을 잔에 따랐는데, 가만히 지켜보던 초등학교 5학년 딸내미가 불쑥 말을 건넨다. “아빠, 이 와인 도수 높지 않아?” “맞아. 20%인데, 어떻게 알았어?” “잔 안쪽에 흘러내리는 눈물 보고 알았지.” 항상 집에서 가족과 와인을 마시다 보니 와인 평론가로서의 미래가 기대되는 역대급 초등학생이 탄생했구나.

일단 포크를 들고 케이크를 푹 찔러 충분한 양을 뜯어낸 뒤 호기심 가득 찬 구강으로 투입했다. 오물오물, 우물우물, 쭈압쭈압. 오오!! 특급 호텔 가서 엄청 비싼 케이크를 살 게 아니면 근처 투썸플레이스에서 구입하라는 수많은 조언이 완벽하게 납득되는 놀라운 풍미였다. 진득하고 두툼한 초콜릿이 빵 안에 층층이 쌓여 있는데, 이 녀석들이 씹을 때마다 빵과 뒤섞여 부드러우면서도 꾸덕꾸덕한 근래 보기 드문 절륜한 식감을 만들어내는 것 아닌가. 초콜릿의 진득하고 고급스러운 단맛이야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테고.

이제 포트와인의 시간이 도래했다. 초콜릿이 한바탕 뒹굴었던 곳에 들어가서 살아남을 음식이 있겠냐는 의구심이 있다면, 아직 포트와인을 경험하지 않은 것이다. 달달한 초콜릿을 그보다 한층 달콤한 와인으로 씻어내는 개운함이라니! 그 비밀은 역시 포트와인의 상큼한 신맛과 달큰한 알코올에 있다. 그 쨍한 산도와 높은 알코올이 초콜릿케이크의 느끼하고 어지러운 여운을 순식간에 정리하고 신선하고 과실감 넘치는 깔끔한 단맛으로 대체한다.

달콤한 디저트 와인이다 보니 사흘에 걸쳐 조금씩 다양한 조건에서 마셨는데, 일단 좀 차갑게 마시는 편이 훨씬 느낌이 좋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첨가된 브랜디 특유의 향기가 잦아들어 오히려 마시기 편했다. 그러니 벌컥벌컥 마시기보다 며칠에 걸쳐 변화를 즐기기를 권한다. 한참 글을 쓰다가 맛있게 먹는 아내의 모습과 와인 도수를 맞혀 의기양양한 딸의 얼굴이 떠올라 배시시 웃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전세계의 스케줄을 좌지우지하는 로마 황제도 초콜릿케이크와 포트와인의 저세상 궁합은 경험하지 못했을 것 아닌가. 어쩌면 우리는 생각보다 조금은 더 행복한 건지도 모르겠다.

글·사진 임승수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저자 reltih@nate.com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 746자 1.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 746자

결혼을 약속한 남친이 있는데 다른 남자와 자고 싶어요 2.

결혼을 약속한 남친이 있는데 다른 남자와 자고 싶어요

혀끝에 닿는 술맛, “감렬한데!” 3.

혀끝에 닿는 술맛, “감렬한데!”

“기러기 아빠라” “접대 위해서”…딱 걸린 남자들 4.

“기러기 아빠라” “접대 위해서”…딱 걸린 남자들

연탄불에 보글보글 끓던 빨간 국물 5.

연탄불에 보글보글 끓던 빨간 국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