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의 새 경형 에스유브이(SUV) 캐스퍼. 현대차 제공
1991년 5월 대우국민차는 아주 작고(Tiny) 편안한(Comfortable) 차 하나를 선보였다. 배기량은 796㏄, 무게도 640㎏밖에 나가지 않아 자동차 성능의 지표가 되는 최고출력이 고작 42마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작고 가벼워 기름 1ℓ만 있으면 무려 24.1㎞를 달릴 수 있었고 가격도 300만~400만원으로 저렴해 출시된 해에만 3만대 이상 팔리는 큰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경차 티코 이야기다.
당시 대우국민차는 경차를 만들어본 경험이 없고 기술력도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일본의 스즈키와 손을 잡고 스즈키에서 나오는 알토 3세대의 플랫폼과 파워트레인을 가져와 티코를 생산했다. 브랜드만 대우국민차를 달았을 뿐 스즈키 알토와 거의 같은 차라고 봐도 무방했다.
티코가 오랜 기간 경차 시장을 독점해왔지만 판매량이 많지 않고 수익도 적은 시장이었기 때문에 다른 자동차 제조사들은 굳이 그 시장에 뛰어들지 않았다. 그러다 1995년 경차 보급을 늘리기 위해 정부가 시행한 경차 혜택에 힘입어 티코의 판매량이 급격하게 오르자 현대차에서도 1997년 아토스를 내놓았다. 현대차는 티코와 차별화를 위해 800㏄ 배기량의 작은 엔진에도 불구하고 직렬 4기통인 입실론 엔진을 얹는 것뿐 아니라 패키징과 상품성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아토스는 독점이나 다름없는 티코를 무서운 기세로 뒤쫓았으며, 급기야 1997년 12월 티코를 밀어낸 것도 모자라 모든 차종 판매량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경차는 불황이 호재인 대표적인 차종이다. 경제가 좋지 않을수록 경차의 판매량이 껑충 뛴다는 이야기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 17만대 이상 판매되며 경차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해 이전에 없던 호황기를 맞이했다. 당시 전체 내수 차 판매량의 22.8%에 이르는 수치였다. 이후 자동차 브랜드들은 경차의 가능성과 시장성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경차를 출시했다. 대우자동차는 티코 이후 새로운 경차 모델인 마티즈를, 기아차는 아토스의 가지치기 모델인 비스토를 선보였다. 세 모델의 경쟁은 치열했고, 그 속에서 살아남은 차는 대우 마티즈였다. 현대 아토스는 2002년 후속 모델 없이 단종을 맞이했고, 기아 비스토 역시 2003년 단종됐다.
2008년 경차 기준이 800㏄ 미만에서 1000㏄ 미만으로 바뀌면서 소형차였던 기아 모닝이 경차로 편입돼 마티즈와 모닝의 양자구도가 한동안 펼쳐졌다. 이후 대우 마티즈는 쉐보레 스파크로 바뀌고 기아차에서는 또 하나의 경차인 레이를 선보였다. 기아 레이는 박스카 구조와 슬라이딩 도어, 터보 엔진을 내세워 마니아들을 만들어냈지만 경차 시장의 주 판매 모델은 모닝과 스파크였다.
탄탄했던 경차 시장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2012년부터다. 판매량이 해마다 떨어졌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기아는 모닝에 에어컨을, 쉐보레는 스파크에 김치냉장고를 사은품으로 제공했다. 당시 어떤 자동차 칼럼니스트는 두 회사의 치열한 할인 경쟁을 두고 ‘가전 회사만 웃게 한 전쟁’이라고 뼈 있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경차 시장이 흔들리기 시작한 데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대표적인 건 소형 스포츠실용차(SUV)의 등장이다. 쌍용차가 티볼리를 출시하면서 경차 판매량이 살짝 요동치더니 이후 현대 코나, 기아 셀토스, 쉐보레 트레일블레이저 등 브랜드를 대표하는 소형 에스유브이가 쏟아져 나오면서 급감했다. 또한 안전성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퍼진 것과 높아진 국민소득 등도 경차 시장에 악영향을 끼쳤다. 2012년 20만대를 훌쩍 넘겼던 경차 판매량은 2020년 들어 반토막이 나며 10만대를 넘지 못했다.
경차 시장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현대차는 지난 9월29일 경형 에스유브이인 캐스퍼를 출시했다. 국내 경차 시장이 30년이 넘었는데 국산 에스유브이로 나온 경차는 캐스퍼가 처음이다. 물론 이전에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다. 1990년대 후반에 현대그룹은 경형 에스유브이를 선보이려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아이엠에프 외환위기와 현대그룹 왕자의 난을 거치며 현대정공이 현대자동차그룹으로 넘어가는 풍파 속에서 경형 에스유브이 프로젝트 소식은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에스유브이 열풍과 경차 시장에서도 다양한 차종을 요구하는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경형 에스유브이에 대한 수요로 이어졌고, 때마침 광주형 일자리의 일환으로 광주글로벌모터스가 현대차그룹 관계협력사로 설립되면서 캐스퍼가 탄생했다.
티코의 대항마였던 현대 아토스. <한겨레> 자료사진
경형 에스유브이라고 해서 일반 경차와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1.0ℓ 엔진을 얹었고 3595㎜(길이), 1595㎜(너비), 1575㎜(높이) 크기로 자동차관리법에 명시된 경차 기준에 부합한다. 길이와 너비는 동일하지만 모닝이나 스파크보다 전고가 더 높다. 경차 전용 혜택도 동일하게 주어진다. 책임보험료 10% 할인, 취득세 면제, 지역개발 공채 4% 할인, 고속도로·유료도로 통행료 50% 할인, 공영주차장 50% 할인, 지하철 환승 주차장 80% 할인, 경차 전용 주차장 등이다.
캐스퍼는 경차가 가지고 있던, 안전성이 떨어지고 저렴하다는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경차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운전자 주행보조 시스템을 살뜰히 챙겼고, 7개의 에어백이 전 트림에 기본 적용되는 등 기능과 옵션을 다양하게 담았다. 게다가 모든 좌석이 폴딩돼 차박이나 여러 용도로 쓸 때도 용이하다. 최근 차박 열풍으로 경차로 차박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애프터마켓에서 전 좌석 폴딩 작업을 해야 한다. 캐스퍼는 그런 수고와 비용, 시간이 들지 않는 것도 장점이다.
과연 캐스퍼는 10만대 아래까지 떨어진 경차 판매량을 반전시킬 수 있을까? 아직 그 결과를 알 수 없지만 시작은 좋다. 캐스퍼는 현재 사전 예약 2만5000대를 달성하면서 현대차가 계획했던 연간 판매량 1만2000대를 2배 이상 웃돌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자동차 업계 역시 캐스퍼의 동향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다. 캐스퍼의 흥행으로 경차도 재도약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다른 자동차 브랜드들 역시 경차 투자를 고려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 작고 가벼운 경차인데 캐스퍼의 어깨가 사뭇 무거워 보인다.
김선관(<오토캐스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