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조할머니의 이름은 ‘아지’였다. 찬 바람 불 때면 사탕이라고 하면서 내게 배추 꼭지를 내밀었다. “꼭꼭 씹어봐. 사탕보다 더 달다!” 순순히 그걸 씹고 있을 만큼 착하지 않았던 나는 할머니한테 늘 대들었다. “이럴 거면 이름을 배추라고 하지 그랬어!”
배추와 관련된 할머니와의 추억은 진짜 다양하다. 김장철이 되면 난 도망 다니기 일쑤였는데 돼지고기를 삶는 냄새가 나면 할머니 옆에 슬그머니 앉았다. 그러면 할머니는 잘 절여진 노오란 배추속대를 두장 뜯어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돼지고기를 감싸 호호 불어가며 내 입에 쏙 넣어주곤 하셨다. 김치를 담가놓은 장독대에 육수를 부을 때 내가 옆에서 뛰어다니면 등짝을 한대 후려치기도 하셨다. “먼지 타면 배추 다 썩어, 이것아!”
추억 속의 배추는 사실 맛이 없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요리를 하기 시작하면서 할머니가 신봉하던 배추 맛이 뭔지 알게 됐다. 특히 겨울 배추는 위대한 맛이라는 걸. 배추는 11월부터 비로소 맛이 들기 시작한다. 겨우내 밭에서 겉장을 이불 삼아 추위를 견딘 배추는 2~3월쯤 되면 속이 더 단단해지고 단맛이 절정에 오른 월동배추로 거듭난다. 이렇게 추위를 이겨낸 배추의 뿌리 부분, 그러니까 배추 꼭지를 어르신들은 사탕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이 배추 꼭지를 씹으면 놀라울 정도의 단맛이 배어 나온다. 응축된 단맛이 바로 겨울 배추의 맛이다.
김치를 담글 때 배추 꼭지 부분에 소금을 문질러 절인 다음 이파리 부분을 나중에 절인다. 이렇게 하면 김치를 오래 놔둬도 무르지 않는다. 배추된장국을 끓일 때 배추 꼭지를 먼저 넣고 육수 내듯 끓이면 국물이 달고 감칠맛이 난다. 배추전을 잘 부치는 방법은 배추 머릿대를 칼로 자근자근 내리쳐 단맛이 배어 나오게 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최소한의 밀가루를 입혀 기름에 지지면 고소하고 감칠맛 나는 배추전이 완성된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밀가루를 도둑맞은 장금이가 배추를 만두피로 써서 우승하는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이 요리가 바로 숭채만두다. 숭채는 배추의 옛 이름이다. 요즘 유행하는 글루텐프리 만두가 그 옛날에도 이렇게 존재했었다. 배추의 초록색 겉장을 우거지라 부르는데, 이 우거지는 한번 삶았다가 물기를 꼭 짜고 들기름과 된장에 버무려 슬쩍 볶아 먹으면 최고의 술안주 겸 반찬이 된다.
배추의 계절은 지금부터다. 우리 식탁 위에 양파, 마늘처럼 매일 사용할 수 있는 채소를 꼽으라면 바로 배추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배추 한통을 사면 12월이 즐겁다. 홍신애 요리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