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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북대서양 겨울 느낌 물씬…‘아란 스웨터’ 어때요?

등록 2021-11-25 12:59수정 2021-11-25 22:22

아일랜드 아란섬에서 온 스웨터

섬 여인들과 얽힌 이야기는 ‘거짓’
사회운동과 세계화가 만나 명성 얻어
제주 한림수직 아란 스웨터도 인기
제주의 콘텐츠를 발굴하는 재주상회, 친환경 패션 전문 사회적 기업 아트임팩트, 재단법인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가 함께한 ‘한림수직 재생 프로젝트’의 아란 스웨터. 재주상회 제공
제주의 콘텐츠를 발굴하는 재주상회, 친환경 패션 전문 사회적 기업 아트임팩트, 재단법인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가 함께한 ‘한림수직 재생 프로젝트’의 아란 스웨터. 재주상회 제공

올겨울 무엇이 유행해도 누군가는 이 옷을 입고 있을 것이다. 연유색, 굵은 짜임새. 새로 사도 헌 옷 같고 몇 년이 지나도 지난달 산 듯한 옷, 아란 스웨터다.

아란 스웨터의 ‘아란’(Aran·애런)은 아일랜드 서해안 골웨이만에 있는 세개의 섬을 가리킨다. 아란섬은 아직도 영어 대신 켈트족계 토착 언어인 게일어가 남아 있는 곳 중 하나이며, 세 섬 가운데 인구가 가장 많은 이니시모어의 인구가 800여명일 정도의 벽촌이다. 아란 스웨터는 이 섬 사람들이 짜던 스웨터다.

아란 스웨터 이야기는 아일랜드 하면 떠오르는 신비로운 분위기와 맞닿아 있다. 밧줄 무늬나 다이아몬드 무늬 등 아란 스웨터의 무늬마다 의미가 있어서 집집마다 다른 무늬의 스웨터를 짠다거나, 아란섬 여성들이 바다로 나가는 남편들에게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며 아란 스웨터를 짜 준다는 전설도 유명하다. 바다로 나간 남편이 물에 빠진 뒤 오랫동안 바다를 떠돌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채 바닷가에 쓸려와도 아란 스웨터의 무늬로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옛 ‘한림수직’에서 짠 작업물을 몸에 대보며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성들. 재주상회 제공
옛 ‘한림수직’에서 짠 작업물을 몸에 대보며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성들. 재주상회 제공

이야기와 물건이 만든 후광

이 애절한 사연은 안타깝게도 사실이 아니다. 전설의 유래는 아일랜드 연극 <바다로 달리는 사람들>(Riders to the Sea)에서 찾을 수 있다. 더블린 출신 극작가 존 밀링턴 싱이 아란섬으로 건너가 그들의 삶을 몇년 동안 관찰한 다음 <아란섬>이라는 책을 썼고, 그때 섬사람들의 삶을 관찰하다 들은 이야기를 훗날 연극으로 옮긴 것이다. 아름답다고 가짜가 진짜가 되지는 않는다.

아란 스웨터 이야기는 물건과 전설이 붙어 후광을 만든 사례 중 하나다. 사람은 이야기로 세상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나 이야기 자체는 만질 수도 없고 냄새도 나지 않는다. 그래서 인류는 유사 이래 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이야기가 담긴 물건을 만들어 왔다. 종교나 국가의 각종 상징물이 대표적인 예다. 패션에서는 이야기가 물건에 신화를 붙여주는 재료로 쓰인다. 각종 고가품 회사가 열심히 자신들의 브랜드 스토리를 만들고 가꾸는 이유다. 실제의 아란 스웨터는 부지런한 운동가와 세계화의 합작품이다. 아란 스웨터를 알린 사람은 아란 반대편 아일랜드 동쪽 지방 도니골 출신 사회운동가 뮤리얼 게이언(Muriel Gahan)이다. 그는 1930년에 더블린에 ‘컨트리 숍’이라는 가게를 만들었다. 판매망을 가지지 못한 아일랜드의 시골 물건들을 대신 판매하는 민예품점이었다. 그 가게에서 팔던 민예품 중 하나가 아란 스웨터였고, 그 덕에 아란 스웨터가 아일랜드 전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란 스웨터가 국제적으로 유명해진 계기는 공항 면세점이었다. 세계 최초의 공항 면세점이 아일랜드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예전에는 항공기 운항 거리가 짧아 장거리 비행 중 한번씩 착륙해 기름을 넣었다. 아일랜드 섀넌 공항은 그 중간 기착지 중 하나였다. 예나 지금이나 항공 여행자들은 중간 기착 공항을 떠돌며 이국의 기념품을 찾는다. 그 모습을 본 당시 공항 직원이 세계 최초의 공항 면세점을 만들었고, 섀넌 공항에 잠깐 내린 여행자들이 아일랜드 토산품 아란 스웨터를 사며 이 옷이 국제적인 유명 상품이 되었다. 물에 빠져 죽은 어부 전설과 장르는 다르지만 흥미롭기로는 이쪽도 못지않다.

아란 스웨터의 무늬. 특유의 두툼한 두께와 토속적인 무늬만이 주는 멋이 있다. 바버샵 제공
아란 스웨터의 무늬. 특유의 두툼한 두께와 토속적인 무늬만이 주는 멋이 있다. 바버샵 제공

이야기가 아무리 좋아도 물건이 별로면 소용없다. 아란 스웨터는 그냥 봐도 예쁘다. 아란 스웨터 특유의 두툼한 두께와 토속적인 무늬만이 주는 멋이 있다. 그래서인지 스티브 매퀸, 그레이스 켈리, 매릴린 먼로 등 역사적인 멋쟁이들이 아란 스웨터를 입었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해리도, ‘캡틴 아메리카’로 유명한 크리스 에번스 역시 영화 <나이브스 아웃>에서 아란 스웨터를 입고 나왔다. 왠지 남자가 아란 스웨터를 입으면 수수하고 순박해 흔히들 말하는 교회 오빠(엄밀히는 ‘켈트 오빠’지만) 느낌이 난다. 2020년 세계적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도 신작 앨범을 발표하며 아란 스웨터를 입었다.

정통 아란 스웨터가 약간 노란빛을 띠는 이유는 가공하지 않은 양털로 만들어서다. 천연 양털에는 라놀린이라는 지방 성분이 묻어 있다. 보습과 세포재생에 도움이 되어 화장품 성분으로도 쓰이니, 라놀린이 듬뿍 묻은 아란 스웨터를 입으면 확실히 따뜻하다. 다만 라놀린의 양 냄새가 있다. 아란 스웨터를 비롯한 정통파 양털 스웨터를 입으면 늘 양 한 마리를 몸에 감고 다니는 듯한 기분이 따라온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러나 지금은 온갖 대체품이 만들어진 21세기. 정통의 불편함 없이 아란 스웨터를 즐겨도 된다. 아란 스웨터의 밧줄 무늬는 이미 전세계 거의 모든 니트 회사에서 나온다. 어부의 스웨터라는 뜻을 가진 ‘피셔맨스 스웨터’ 같은 걸 고르면 거기엔 확실히 굵은 아란풍 무늬가 짜여 있다. 정통 아란 스웨터에 확실히 대체 불가능한 멋이 있다 해도, 모든 세계인이 3년 묵은지를 즐길 필요가 없듯 변형 축약된 아란 스웨터의 흔적을 즐기는 것도 좋겠다.

패트릭 제임스 맥글린치(임피제, 1928~2018) 신부는 제주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아일랜드에서 수녀들을 모셔와 스웨터 직조법을 교육하며 사업을 일궜다. 사진은 한림수직 작업 현장. 재주상회 제공
패트릭 제임스 맥글린치(임피제, 1928~2018) 신부는 제주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아일랜드에서 수녀들을 모셔와 스웨터 직조법을 교육하며 사업을 일궜다. 사진은 한림수직 작업 현장. 재주상회 제공

아일랜드와 이어진 한림수직

아란 스웨터는 한국과도 관련이 있다. 한국이 가난을 벗어나려 혼신의 힘을 다한 1960년대 우리를 도와준 외국인 선교사들이 있었다. 그중 제주도에서 자리를 잡은 패트릭 제임스 맥글린치(임피제, 1928~2018) 신부가 아일랜드 출신이었다. 그는 제주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아일랜드에서 수녀들을 모셔와 제주 여성들에게 아란 스웨터 직조법을 교육해 사업을 일궜다. 그게 제주 칼호텔과 조선호텔 등에서 판매했던 제주 특산 니트 한림수직이다. 아란 스웨터와 한국은 이렇게 의외의 끈으로 이어진다.

아란 스웨터에 묻은 이야기의 힘은 이번에도 강하다. 한림수직은 2005년 문을 닫았지만 2021년인 올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제주의 콘텐츠를 발굴하는 재주상회, 친환경 패션 전문 사회적 기업 아트임팩트, 재단법인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가 함께 한림수직 이야기를 씨앗 삼아 ‘한림수직 재생 프로젝트’ 크라우드펀딩을 진행한 것이다. 마감까지 열흘 넘게 남은 현재 이미 대성공을 거둬 목표액의 2000% 이상을 채웠다. 나도 원고를 적다 이 프로젝트를 알게 되어 후원이라는 이름의 쇼핑을 해버렸다. 이번달 원고료도 이렇게 사라져버리는구나.

박찬용 칼럼니스트

옛 한림수직 라벨. 재주상회 제공
옛 한림수직 라벨. 재주상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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