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잔을 함께 기울일 수 있는 또래 친구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와인을 좋아하는 친구는 드물다. 내가 고기를 좋아하지 않아 주로 친구들과 회를 먹는 경우가 많다. 날이 차가워지는 요즘부터가 회를 즐기기 좋은 때다. 이런 자리에 나는 종종 와인을 들고 나간다. 그러면 친구들은 나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본다. “회에는 소주지”라는 말을 잊지 않으면서.
우리나라에서 회를 먹는 방식은 참 다양하다. 회를 간장과 고추냉이에 찍어 먹는 보통의 방식과 어울리는 와인은 제법 많다. 소비뇽 블랑, 리슬링, 샴페인 같은 스파클링 와인 등이다. 하지만 초장·쌈장의 경우엔 이야기가 다르다. 양념의 강렬함에 와인이 밀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에는 소주라는 공식이 생겼을 것이다.
그렇지만 소주만큼 한국식 회 문화에 어울리는 와인이 있다. 로제 스파클링이다. 한국에서는 다소 생소하지만 영미권에서는 인기가 높다. 가장 화려한 것이 로제 샴페인이다. 와인 색깔이나 포장이 얼핏 보면 화장품처럼 보인다.
로제 와인은 해산물을 즐겨 먹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에서 유래했다. 화이트 와인에 포도 껍질을 함께 넣어 발효시키거나 포도즙을 넣어 색깔을 낸다. 스파클링 역시 어떤 맛과 향도 경쾌하게 바꿔준다. 하지만 천하의 로제나 스파클링도 각각 쌈장에 묵은지까지 곁들이는 한국의 회 문화에는 역부족이다.
이럴 때 두 와인을 섞어놓은 로제 스파클링이 요긴하다. 이 와인은 회를 쌈장과 함께 상추·깻잎에 싸 먹는 한국적 방식에 잘 어울린다. 로제 스파클링은 보통 그 화려한 색깔과 낭만적인 맛과 향 때문에 아이스크림이나 케이크와 즐기는 디저트 와인이다. 나는 이 화려함을 풍미 강한 한국식 회를 즐기는 데 쓴다. 한옥에서 비단 병풍을 쳐놓고 와인을 마시는 격이지만 뜻밖에도 조화롭다. 더 좋은 것은, 아직 이 와인이 우리나라에서는 대중적이지 않아 일반적인 스파클링에 견줘 가격이 ‘착하다’는 점이다.
내가 애용하는 로제 스파클링의 하나는 비녜롱 드 뷕시 크레망 드 부르고뉴 로제 브뤼(Vignerons de Buxy Cremant de Bourgogne Rose Brut)다. 프랑스 부르고뉴에 있는 뷕시 와이너리는 껍질 벗긴 피노 누아르(80%)와 가메(20%)를 블렌딩한다. 둘 다 레드 품종이다. 그래서 이 와인은 보통의 로제보다 붉고 산도가 있다. 마셔보면 목을 간지럽히는 청량함과 함께 과일향과 꽃향기가 입안 가득하다. 높은 산미 덕에 마무리도 상큼하다. 마늘 쌈장은 물론 묵은지를 곁들인 회와도 잘 어울리는 비결이다. 물론 이 와인은 원래 만든 의도대로 케이크나 과일 같은 디저트와도 찰떡궁합이다. 또 샐러드와 함께 하는 식전주로도 무난하다. 화려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듬직한 친구다.
그런데 이런 묘미를 내 친구들은 잘 모르는 거 같다. 어쩌면 화장품 같은 얄궂은 핑크빛 와인을 쌈장 올린 회와 먹는다는 걸 쑥스럽게 느끼는 거 같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이 구박해도 이 와인을 자주 들고 간다. 장밋빛 계란을 친구들의 통념이란 바위에 계속 던지고 있다. ‘볼 빨간’ 중년인 내 친구들에게서 “그 화장품 같은 와인, 꼭 가져와”라는 말을 언젠가 듣기를 기대해보면서.
권은중(음식 칼럼니스트)